[음성설교]
 

사사기 16:4~31 삼손과 들릴라 2013. 5. 26

 

16:4.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합니다. 들릴라의 뜻은 걸다, 매달다, 쇠약하다, 연약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약한 자라는 뜻입니다. 강한 자 삼손이 약한 자 들릴라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런 삼손을 보고서 자꾸만 삼손은 자기 쾌락에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움직입니다(13:25). 그러면 삼손과 들릴라를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아야 하고 우리의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만 매달려 살아야 하는 약한 자가 이스라엘과 오늘날 교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버리고 블레셋에 매달려 사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강한 자 삼손이 약한 들릴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16:5. 블레셋 방백들이 들릴라에게 삼손을 꾀어서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어떻게 하면 결박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 준다고 합니다. 블레셋은 대표적인 성읍이 다섯 개입니다. 그러면 오천 오백 개의 은을 받습니다. 엄청난 금액입니다.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입니다. 들릴라는 이 돈의 유혹을 받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삼손을 끈질기게 조릅니다.

 

16:6~17. 삼손이 들릴라의 말을 듣고서 여러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새 활줄 일곱 가닥으로 묶기, 쓰지 아니한 밧줄로 묶기, 바디에 머리털을 짜기, 이 모든 것들이 아무른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들릴라가 당신이 마음이 내게 없으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느냐며 세 번이나 나를 속였다고 합니다. 16절을 보면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격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삼손이 자신은 나실인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머리가 밀리면 힘이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16:18~22. 삼손의 진심을 본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을 오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무릎에 삼손을 눕게 하고서는 머리털 일곱 가닥을 다 밀어버립니다. 이렇게 깊이 잠이 든 것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술에 무엇을 탔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몇 번의 시도도 삼손이 알아채지 못한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한 모양입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괴롭혀 보니 힘이 없는 것을 알고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다고 하자 전에처럼 몸을 떨칠 것이라고 하는데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 버리신 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눈이 뽑히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에 매여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삼손의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말아야 하고 죽은 사체에 접촉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다른 규례들도 다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기에 힘이 빠진 것입니다. 만약 머리카락에 힘이 근원이 있다면 옛날에 나온 머털도사라는 만화가 됩니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밀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민수기 6:18절입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나실인의 규례를 마치면 머리카락을 밀어서 화목제물과 함께 불에 살라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머리카락이 밀린 것은 이제 나실인으로 마지막 일을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머리카락만 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 죽는 것으로 나실인의 일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례는 그 유례까지 살펴보면 바쳐진 자, 방백, 뛰어난 자, 존귀한 자, 스스로 구별하다, 근신하다. 드리다. 왕관, 제사장의 관, 패, 면류관 등으로 사용됩니다. 결국 이러한 성경의 용례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모아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이야기를 통하여 장차 나실인으로 오셔서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그림자로 미리 보는 것입니다.

 

16:23~25.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에 의하여 머리카락이 밀리고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삼손이 이제 다곤의 신전에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합니다.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땅을 망쳐놓고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삼손으로 하여금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삼손과 들릴라는 영화를 보면 물론 성경의 내용을 너무 많이 각색하여 만들었습니다만 삼손을 신전에서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에게 제사하면서 먹고 마시며 즐깁니다.

 

16:26~31.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자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집이란 왕궁으로도 하나님의 전으로도 함께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 집의 기둥을 붙들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저들과 함께 죽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집과 함께 죽을 때에 그곳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 삼천 명도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 안에 삼손이 사랑한 여인 들릴라도 함께 있었다고 봅니다. 영화에 보면 들릴라가 삼손을 유혹하고 넘겨주었지만 삼손의 사랑에 감동하여 마지막에 삼손을 다곤 신전에 이끌어가는 자가 들릴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은 상상한 각색이지만 삼손의 사랑을 받은 들릴라가 삼손의 죽음에 합류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연약한 여인을 사랑하여 자신의 머리털이 밀리고 눈이 뽑히고 죄인처럼 옥에서 맷돌을 돌리다가 그들의 신전에서 온갖 조롱을 당하고 그 신전과 함께 죽는 삼손이 누구의 모습으로 보입니까? 예수님으로 말하기에는 무언가 거리끼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삼손의 예수님의 모형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의 문짝을 뜯어 버리는 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고대 교회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죄를 정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온갖 조롱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7:27~31, 39~42절입니다.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사사기의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의 신전에서 그들의 신을 찬양하며 삼손을 조롱하는 자들이 마태복음에서 누구입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입니다. 이들이 이방신전의 사제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손의 죽음은 그들과 함께 죽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들릴라 같이 연약하여 돈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팔아넘긴 그런 여인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품에 안고 함께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조롱과 치욕의 죽음인 그 십자가에 우리가 함께 못 박히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이 창기와 같이 연약한 자임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매달리는 연약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