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룻기 4:1~22 마라에서 나오미로 2013. 8. 11

 

룻기서 마지막 장을 보면서 기업 무름에 대하여 다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레위기 25:23~28절입니다.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2)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소작인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안식년과 희년의 법을 말씀하면서 토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토지는 사고팔고 할 수 없습니다. 토지의 주인은 하나님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작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을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져서 땅을 팔 때는 경작권만 팔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 땅을 언제나 되 무를 수 있습니다. 본인의 능력이 안 되면 친척 중에 기업을 무를 자가 대신 무르게 하면 됩니다. 그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자기에게로 땅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땅을 되돌려 준 것은 몇 번의 기록이 있습니다(왕하8:1~6). 그 중의 하나가 룻기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가장 큰 경제문제는 토지의 문제입니다. 땅 또는 부동산이 없는 자는 늘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전세금을 올리고 토지 임대료를 올리면 가난한 자들은 살아가기가 더욱 힘들게 됩니다. 토지의 문제는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약 백 년 전의 사람인 헨리 조지의 책을 지금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고 그러한 협회를 만들어 토지경제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토지를 사유화 하지 말고 공적인 개념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도가 수천 년 전 성경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성경의 이런 안식년과 희년과 고엘의 법들이 제대로 시행이 된다면 어느 누구도 절대빈곤층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 제대로 준행하지 않음으로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고 결국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이사야 5:8~10절입니다. “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그러므로 법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탐심이 문제인 것입니다.

 

신명기 25:5~10절입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레위기와 신명기의 이 말씀이 오늘 보는 룻기 4장에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에 이 놀라운 법이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룻기 4:1~6. 성문에서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를 부르고 성읍의 장로 열 명도 청하여 앉게 하고서는 기업 무를 일에 대하여 의논을 합니다. 3절을 보면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를 팔려고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자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경작권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민 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고 갔을 텐데 다시 팔려고 한다는 것은 그 기업을 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신 누가 물러주면 그 땅이 다시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가장 가까운 친척에서 기업을 무르겠느냐고 하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취하여 말론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고 하자 자기에게 손해가 올 것 같아서 거절합니다.

 

7~8. 신명기 25장의 말씀대로 신을 벗어 넘겨줍니다. 소유권을 넘겨주었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기업 무를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하여 보아사가 합당하게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읍의 장로들이 증인이 되고 백성과 장로들이 룻을 축복합니다. 1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유명하게 된다는 것은 이름이 원래 있는 자인데 더욱 유명한 이름이 되라고 축복합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다 하지 않은 사람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도 보아스가 그 사람을 부를 때에 아무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 축복하기를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와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씨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흉을 보거나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을 하는 말에 사용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25장의 시형제 결혼의 법을 알고 있기에 하는 축복입니다. 다말의 목숨 건 희생으로 유다의 씨를 이어준 것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지금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를 만나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 말론의 대를 이어주는 것은 다말과 같은 축복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계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13~17.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어줍니다. 오벳이란 섬기는 자, 봉양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아이를 않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의 할아버지가 오벳입니다.

 

풍족하게 나간 희락이라는 나오미의 이름이 텅 비어 돌아왔을 때에 자신이 스스로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룻의 희생과 고엘이 되는 보아스의 희생으로 인하여 마라에서 나오미가 된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희락이 되었습니다.

 

18~22. 유다와 다말에게서 나온 베fp스의 족보를 말합니다. 베레스로부터 람, 암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으로 연결됩니다. 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 속에 마라였던 여인들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이들이 다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들의 공통된 점은 다 마라와 같은 고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쓴 고통의 여인들이 기쁨이 되는 것은(마라에서 나오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것입니다(요일5:11,12). 이것이 새 일이며 새 언약입니다(렘31:22). 누가복음 2:28~29절입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