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룻기 1:6~22 텅 빈 나오미를 따르는 룻 2013. 7. 14

 

나오미가 떡집이라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에 거류하려고 왔지만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늙었고 더 이상 아무른 소망이 없이 텅 비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쁨이라는 나오미의 이름이 자기 스스로 마라라고 할 정도로 쓰디 쓴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6~10.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고 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가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여 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선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의 성경 용례를 보면 사람들 사이의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 등으로 사용되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에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인애, 성실, 긍휼, 아름다움 등으로 사용됩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언약적인 사랑이라는 말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압의 두 며느리가 죽은 자인 그들의 남편에게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모에게도 헤세드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모가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헤세드를 간구하면서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어 재혼하여 살라고 합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 모두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며느리가 있을까요? 그래서 어버이 주일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로 자주 사용이 됩니다.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텅 비어버린 시모를 따라 나서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시모와 며느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모든 성경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됩니까? 텅 비어버린 나오미를 따라 나선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11~14. 나오미를 따라 나선 며느리들에게 간곡하게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들이 나오미를 따라온들 아무른 소망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율법인 계대결혼(繼代結婚)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신명기 25:5~6절입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대로 하려고 해도 지금 나오미는 너무 늙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그 아이가 자라도록 어떻게 기다리겠느냐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오미는 철저하게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며느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로 인하여 너희가 이렇게 된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시어머니는 어떻게 말할까요?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서 남편 잡아먹고 집안 망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두 며느리가 다시 소리를 높여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돌아가지만 룻을 그를 붙좇았다고 합니다.

 

15~18. 오르바가 돌아간 것을 보고 나오미는 룻에게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룻은 어머니를 떠나라고 강권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자기도 가겠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최종적인 맹세입니다. 그러자 더 이상 나오미가 말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룻이 무엇을 보고 이렇게 텅 빈 나오미를 따라 나선 것입니까? 그것도 여호와께서 치셔서 시아버지도 죽도 두 아들도 죽은 집안에 무엇을 보고 따라 갑니까? 계대결혼 할 희망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시어머니처럼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시어머니를 따라 살다가 시어머니가 죽는 곳에 함께 죽어 묻히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렇게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치셔서 텅 비게 만들어버린 그 나오미를 따라가는 것을 무엇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오르바가 정상이고 룻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19~21. 두 여인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나오미가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는 괴롭다는 말입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고 하느나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적인 상황에서 나오미는 텅 비었고 기쁨이 아닌 슬픔과 쓴맛을 보는 괴로운 인생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나도 남김없이 여호와께 다 털려버린 그런 나오미를 보고서 어떻게 룻이 따라 나선 것입니까? 나오미가 모압에 와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었다면 그런 나오미는 따라 나서겠지만 그런데 더 이상 희망이라고 찾아 볼 수 없는 그 늙은 나오미를 따라 나선 이유를 무엇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룻은 시모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치시는 분이며 이런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하게 보입니다. 오직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이 능력임을 믿게 됩니다. 마치 룻이 텅 비어 버린 나오미를 따라 나선 것이 은혜이듯이 오늘 우리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역시 은혜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란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외국에서 가서 다 날려버립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돼지의 음식으로도 배를 채울 수가 없도록 다 날려버린 그 지경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풍족하였다면 아버지의 집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날리고 나니 그제야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거저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하면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로 맞아주셨습니다.

 

나오미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모압에서 다 잃어버리고 베들레헴 떡집이 떡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옵니다. 둘째 아들이 풍족하게 나갔다가 다 날려버리고 아버지의 풍족한 집을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은 세상에 믿던 것들이 털려지고서 돌아옵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22. 나오미가 베들레헴 돌아온 때가 보리수확 할 때입니다. 그래서 룻이 보리 이삭을 줍게 됩니다. 보리 수확하는 때가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은 유월절이 지나고 첫 보리수확을 하면서 칠 주간을 지난 절기라고 칠칠절이라고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출34:22, fp23:15~16, 신16:16).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다시 떡이 주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 때가 이 절기와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룻처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주 받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습니까?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었기 때문입니다(행1~2장). 그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자기 백성들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십니다. 자기 의가 다 털리고 텅 비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49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