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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4장 이가봇 2013. 9. 22

 

사무엘상 2장에서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예언(2:27~36)과 사무엘상 3장에서 사무엘이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엘리 집안의 심판(3:10~14)이 4장에서 이루어집니다.

 

4:1b~4.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사사기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언제나 먼저 공격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방어적인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4: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먼저 전투를 하려고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 집안의 지도력이 상실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였을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과 사무엘의 예언이 전하여진 상태입니다. 마치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부의 문제를 일으키는 정치를 보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의 붙여주시는 전쟁이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전혀 그런 말씀이 없이 자기들의 전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이 패배하여 약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패배하여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게 하셨는가 합니다. 자기들의 죄는 생각지도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늘 함께 하셔서 언제나 적을 물리쳐야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패배에서 회개하면서 여호와의 뜻을 먼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호와의 뜻을 물은 것이 아니라 전쟁 패배의 원인을 방법론에서 찾았습니다. 언약궤를 가져가지 않아서 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언약의 뜻은 관심도 없이 단지 언약궤를 부적처럼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실로에서 언약궤를 메고 오게 하는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었습니다.

 

5~11.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당도하자 사기가 충천하여 환호성을 지르자 땅이 울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이 외침이 어찌된 것인지 알아보니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온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이 그 진영에 이르렀기에 우리에게 화가 임하였다고 합니다. 이 신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소식을 들었기에 이 능한 신의 손에서 누가 우리를 건지겠느냐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오히려 더 여호와를 아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차피 우리가 지게 되며 전에 우리가 그들을 종으로 삼았던 것처럼 우리가 그들의 종이 될 것이니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이 이겼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가 심히 커서 보병이 삼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궤는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적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고대의 전쟁의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의 성패가 갈린다고 믿는 시대입니다. 언약궤가 적들의 손에 넘어간 것은 이스라엘의 신이 졌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로 인하여 여호와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을 심판하시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조건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자기 이름이 모독을 받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주술적이거나 미신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는 교회에 헌신 충성 봉사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편으로 여기는 자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이 단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헌금을 하고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고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편이니 나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원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어려움이 닥치면 내가 무슨 정성이 부족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서 다시 더 큰 정성을 바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아는 종교 사기꾼들이 더욱더 신에게 정성을 바치도록 온갖 말씀들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12~18. 전쟁에 패배한 날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와서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릅니다. 장례를 치르는 자의 복장입니다. 엘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실로에 오면서 온 성읍이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그 사람에 엘리에게 말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소식과 두 아들의 죽음과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때 엘리는 나이가 구십팔 세이며 눈은 어두웠고 몸은 비대하였습니다. 이런 자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이 의자란 일반적인 의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단어로 보좌로도 사용됩니다. 왕이 앉는 보좌 또는 하나님의 보좌를 말합니다. 이런 의자에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귀하게 여기며 저주를 자청하고 있는데도 금하지 않았던 자가 앉아있었기에 그 의자에서 넘어져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의자에 앉아있습니까? 60년대 대중가요에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당시에 회전의자란 높은 사람들이 앉는 의자였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일부를 옮깁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 없어 비워 둔 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 버렸다 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높은 회전의자에 앉는 길이 험하기에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밟아버리고 그 의자에 앉으면 행복할까요? 이미 행복해야 할 요소들을 다 짓밟아 버리고 앉은 의자이기에 이제 추하게 내려앉을 일만 남은 것입니다. 혼자만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몰락을 합니다.

 

19~22.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할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소식과 그의 시아버지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갑자가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을 하였습니다. 조산이기에 해산하면서 죽어갑니다. 이때 해산을 돕던 여인들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여인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이 여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관념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이 여인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이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19절에서 22절까지 이 여인이 말하는 순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언약궤, 시아버지, 남편, 언약궤, 시아버지, 남편, 언약궤입니다. 가장 중요한 위치와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빼앗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한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78:51~64절입니다. “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54 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55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출애굽과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에 심으셨습니다.

 

“56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61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62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63 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64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을 반항한 것이 사사시대임을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실로의 성막에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65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66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67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0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여호와의 영광이 실로에서 떠나 버린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끝난 자리에서 다시 여호와의 일하심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께서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셔서 일하십니다. 이 내용은 5장에서 언약궤 홀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모습을 통하여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십니다. 다윗에게 언약하신 대로 영원한 위(位)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으신 것입니다. 엘리는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한다는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떠나버리면 우리의 영광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구약시대 때 언약을 주시고 언약의 돌 판과 언약궤를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이 마음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돌 판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며 이 언약은 마음에 기록이 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모습과 늘 반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반대로 가면서 그것이 마치 영광이 되는 양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이가봇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요한복음 5: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 자리가 영광입니다. 이가봇이 된 헛된 영광들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머물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