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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4장 여호와의 구원 2013. 12. 15


블레셋의 공격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집되었지만 블레셋의 3만 병거와 6천 마병과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많은 군대의 숫자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로 숨으며 심지어 요단강 건너까지 도망가 버렸습니다. 정규군으로 뽑힌 3천 명 중에도 2천 4백 명이 도망가고 6백 명만 남았습니다. 이때 요나단이 자신의 병기 잡은 자와 단 둘이 적진을 향합니다.


14:1~7. 6절을 보시면 요나단이 자기 무기든 자에게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는 자들에게 건너가자고 합니다. 할례란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이삭을 낳음으로 할례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삭이 주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유무에 전쟁의 승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할례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 할례의 정신이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여 주시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일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당연히 구원을 얻지 못함을 압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압박하거나 헛된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혹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사람의 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요나단의 믿음이며 이것이 할례 받은 뜻이기도 합니다. 요나단의 무기를 든 자도 마음을 같이하여 따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편이나 되는 것처럼 지나친 확신으로 자기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해라고 협박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가 속한 단체의 일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그 일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교회든 선교단체이든 구호단체이든 이런 식으로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결정에 좌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의 이러한 마음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며 주를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야고보서 4:13~16절입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것이 안개의 자세입니다.


14:8~15. 요나단은 다시 여호와의 사인을 구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갈 때에 그들이 우리에게로 온다고 하면 올라가지 말고 그들이 우리에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의 손에 넘긴 것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단과 병거 잡은 자가 그들에게 나아가니 그들이 조롱합니다.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면서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손에 넘기셨다고 하며 그들에게 나아갑니다. 요나단이 손발로 기어 올라가는데도 그들이 올라오도록 기다린 것은 겨우 두 명이 수비대를 향하여 오기에 방심한 것입니다. 요나단이 올라가자 말자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 엎드려집니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입니다. 둘이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이십 명 가량 쳐 죽입니다. 이때에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큰 떨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큰 떨림이라는 히브리어는 ‘엘로힘’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큰 떨림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16~23.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블레셋 진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사울이 자기 진영에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니 요나단과 그의 무기 잡은 자가 나간 것을 알고 아히야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사장에서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의 구원이 요나단을 통하여 일어나고 있기에 적진을 향하여 공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승리를 보면서도 제사장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블레셋 진영은 소동이 점점 더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기다리다가 이제는 그만 두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요나단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는 행동하고 행동해야 할 때는 기도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행동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데도 기도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행동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핑계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할 때는 자기 확신이 앞서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동기의 저의(底意)는 항상 자기의 이해관계(利害關係)를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군사들이 블레셋 진영에 가보니 이미 적들은 자기들끼리 치므로 크게 혼란함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전세가 기울어지지 블레셋 진영에 속한 히브리사람들이 강제로 끌려왔다가 이스라엘 편에 섭니다. 또 블레셋 군대가 두려워 숨어있던 자들도 싸우러 나와서 적을 추격합니다. 이러한 모든 승리는 23절에서 여호와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결코 사람의 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24~30. 사울이 블레셋을 추격하는 군인들에게 금식을 명하였습니다. 왜 이랬을까요? 여호와의 구원에 자신이 무언가 한 일이 없습니다. 적을 공격한 것도 요나단이 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려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전쟁터에 와 보니 이미 적들은 서로 싸우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여호와의 전쟁은 이런 방식입니다. 그러면 그 승리를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니 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로를 추가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원수를 갚기 까지 저녁까지 금식을 명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우리는 금식하면서 나아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입다가 잘못된 서원을 하여 자기 딸을 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백성들이 적을 추격하며 수풀에 들어갔는데 땅에 꿀이 있음에도 그 꿀을 먹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요나단의 사울왕의 금식명령을 듣지 못하였기에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벌집의 꿀을 찍어 먹으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때에 백성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의 부친이 오늘 금식을 명하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백성들이 피곤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요나단이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왕의 잘못된 금식 명령을 비판하였습니다.


31~35. 사울이 저녁까지 금식을 명하였기에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심히 피곤하여 탈취한 짐승들을 잡아서 피째 먹었습니다. 금식으로 인하여 오히려 율법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큰 돌을 굴려오게 하여 짐승들을 그곳에서 잡아먹게 하였습니다. 큰 돌 위에 짐승의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하여 목 동맥을 잘라 피를 빼고 먹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처음으로 쌓았다고 합니다.


36~46. 사울이 밤에 블레셋 사람을 추격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여호와께 물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여호와께 나아가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응답하지 않는 것은 그들 안에 죄가 있기에 사울이 누구의 죄인지 가리자고 하면서 내 아들 요나단에게 죄가 있다고 하여도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결국 요나단이 뽑힙니다. 요나단이 꿀을 먹은 것을 말하고 알지 못하고 먹었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할 때에 백성이 말립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와 함께 동역하였기에 요나단을 죽이는 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멸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47~52. 사울의 엄청난 업적들을 간단히 몇 줄로 요약 하며 그의 가족을 소개합니다. 사방의 대적들인 모암과 암몬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가는 곳 마다 이겼다고 합니다. 또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 치고 이스라엘을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내용들은 단 몇 줄로 간단하게 기록하는데 사울이 실수만 하는 블레셋과의 전투는 왜 이렇게 길게 상술하였을까요? 여호와의 구원, 여호와의 전쟁이 어떠함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모두가 돌아서 버린 그 십자가로만 구원하시는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수와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롬9:16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