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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6장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013. 12. 29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시면 우리는 흔히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울이 버림을 받는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모습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울의 왕 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요구였습니다. 이 요구를 들어주셨지만 이방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의 왕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왕은 자기 뜻대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여호와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눈치를 보았기에 잘렸습니다. 사울이 버림받는 것을 통하여 우리들이 평소에 얼마나 사울과 같은지를 보아야 합니다.


16:1~3. 사울로 인하여 사무엘이 슬퍼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하여 가면 사울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반역으로 몰아 사무엘도 죽일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라고 합니다. 제사에 이새를 청하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알려주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세우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거나 왕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한 왕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왕이 우상입니다(출32:1). 그래서 사울이 폐위가 됩니다.


4~5.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오자 성읍 장로들이 떨며 맞이합니다. 왕을 세우는 자가 사무엘이었는데 이런 선지자가 와서 자기들에게 무엇을 말할지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평강을 위하여 왔느냐는 질문에 평강을 위하여 왔다고 하면서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왔으니 성결하게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도 제사에 청합니다.


6~7. 이새의 아들들이 사무엘 앞으로 옵니다. 엘리압을 보고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 앞에 있다고 마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울의 용모와 신장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환호하여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무엘도 엘리압의 용모와 신장을 먼저 본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사무엘조차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합니다. 중심이란 마음, 영혼, 의지, 심장 등으로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선함을 보시고 택하신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창6:5, 8:21). 다윗도 예외가 아니기에 간음과 살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보는 식으로 하나님은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8~12. 이새가 아비나답을 사무엘 앞에 지나가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삼마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새가 그 아들 일곱을 다 지나가게 하였지만 여호와께서 그 중에서 아무도 택하지 않았습니다. 일곱이란 완전하다는 의미로 보아도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들 중에 하나님의 택하실 자가 있을까 하여 데리고 온 일곱은 아무도 택함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나 이새나 간에 외모로 본 것입니다. 사무엘이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묻자 이새가 막내가 있는데 양을 지킨다고 합니다. 이새가 제사에도 참여시킬 정도의 아들도 되지 못하다고 여긴 아들이 다윗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그를 데리고 와야 식사를 하겠다고 하여 급히 데리고 오는데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것은 외모를 본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다윗이 용모가 준수하였겠지만 사울과 비교하여 다윗은 아직 소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사람의 조건과 대비되는 관점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신10:17).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을 바리새인들도 인정하였습니다(마22:16).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일로 시비 거는 자들에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요7:24).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주의 천사의 지시로 억지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행10:34). 그러므로 사람을 외형적인 조건으로 취하면 그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9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회당에 부자가 오고 가난한 자가 왔을 때에 차별하여 대하면 이것이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일방적인 긍휼로 구원하십니다. 


야고보서 2:13절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 안에는 차별이 있을 수가 없고 외모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보다 마음이 착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는 생각들과 하나님의 마음이 다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13,18. 다윗이 사울과 다른 마음의 중심에 어떤 선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질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음으로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여호와께 감동되어 다윗의 생애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18절 끝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는 것이 사울에게 다윗을 추천하는 자들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에 다윗의 다윗 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잠시만이라도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간음과 살인을 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인구조사를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만 다윗이 되는 것입니다.


14~23.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크게 감동시키십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합니다. 사울도 여호와의 영에 감동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지만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임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를 알고서 수금 잘 타는 이로 하여금 왕의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령이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을 추천하고 사울은 다윗을 보고 크게 사랑하여 자기 무기 드는 자로 세웁니다. 또 사울에게 악령이 역사할 때에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다윗이 세워집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 자랑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예수님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 사람의 세상적인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라고 고백한다면 이런 자들 안에서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5:11~21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도 외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지를 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계시면 우리도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