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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6~30 사울의 두려움 2014. 1. 12


삼상18:6~9. 다윗이 골리앗을 주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전쟁에서 대승을 합니다. 전투에 나간 군인들이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노래하며 춤추며 악기를 연주하면서 왕 사울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노래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며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다윗에게 돌아갈 칭송이지만 사울왕은 이에 분노하였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차지할 놈으로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것을 사울콤플렉스라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콤플렉스의 사전적 뜻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뒤떨어졌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부하직원이 자신의 자리를 넘겨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감정입니다. 이와 반대의 콤플렉스를 압살롬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다윗 왕에게로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상관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콤플렉스입니다. 이런 감정들이 우리들에게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콤플렉스가 심해지면 의사의 도움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콤플렉스의 근원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에 겸손하였습니다. 왕으로 세우려고 하여도 짐이 있는 곳에 가서 숨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님을 말씀을 버림으로 하나님도 사울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리자 이제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백성들의 칭찬에 사울이 얼마나 분노하는지 18장 이후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마음 상태를 한마디로 말하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중심으로 본문을 봅니다.


10~12. 사울은 천천이며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한 그 이튿날에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댑니다. 전에 성경은 야료(惹鬧)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시끄럽고 흐트러지도록 이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평소처럼 수금을 타지만 사울은 그런 다윗을 향하여 창을 두 번이나 던져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를 12절에서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울이 현재 왕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두려운 것입니다.


13~16. 이런 상태가 되었기에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세워 자기를 떠나게 합니다.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크게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사울은 또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두렵다는 말씀이 나옵니다(15절).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수록 이제 곧 자기를 밀치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온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자기들 앞에서 출입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왕 앞에 출입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는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출입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5:1~2절입니다. “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면서 하는 백성들의 말입니다. 여기서 출입하였다는 것은 사울이 비록 왕으로 있었지만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서 인도하여 출입한 자는 다윗이라는 말씀입니다.


17~19. 사울이 다윗에게 자신의 맏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하면서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울은 자신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여호와를 위한 싸움임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도 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선에는 다윗을 죽이려고 블레셋 사람에게서 죽게 하려고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을 공격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집안이 왕의 사위가 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사울의 요구를 만족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어버렸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골리앗을 물리칠 때 이미 사울이 약속한 내용은 많은 상금을 주며 자기 딸을 주며 세금을 면제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도 지키지 않고 다시 다른 조건을 걸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 때문입니다.


20~27.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일 계략을 씁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다윗에게 왕이 다윗을 사위 삼기를 원하고 왕의 신하도 그렇다고 전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서 감히 왕의 사위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왕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 포피 백 개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서 날이 차기 전에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왕이 원한 포피를 바친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28~30.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들 요나단은 이미 다윗을 사랑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준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다윗의 모든 신하들보다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됩니다. 이제 사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주변나라들까지 새로운 질서가 세워집니다. 기존의 체제인 사울 편에 설 것인가 다윗 편에 설 것인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의 일들을 두려워하여 세상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싫다고 버린바 된 예수님의 편에 설 것인가? 우리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직시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따르려면 기존의 왕의 미움을 받습니다.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래서 다윗을 따른 자들은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몰려간 것입니다(삼상22:2). 이렇게 되어 다윗을 따른 것이 은혜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 왕의 측근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이 두려움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할 때에 무엇이 두려움으로 옵니까? 성경에서 처음 나타난 두려움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입니다. 창세기 3:9~10절입니다.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타락한 인간의 최초의 반응이 벗었기에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두려움이란 결국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니 모든 이웃들이 나의 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에서 어떻게 해방이 될까요?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은 떠나심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면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 두려움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의 영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두려움에 짓눌려 살지 않게 됩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8~19절입니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음을 이기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찬송 39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