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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5장 다윗과 아비가일 2014. 3. 9

 

 

24장에서 심판은 주님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칼을 들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윗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서 그래 나도 이제 심판을 주님께 맡겨야지 하면서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닥치면 그러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생각도 나지 않고 자신이 칼을 빼들고 휘두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25장에서 다윗의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5:1.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리가 슬퍼하며 라마에 장사를 지냅니다. 사무엘의 업적에 비하여 그의 죽음은 단 한 줄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역할이 끝났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24장에서 사울이 다윗을 향하여 네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역할이 이로서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고 있기에 다윗은 바란 광야로 내려갑니다. 바란은 유다의 남쪽 광야지역입니다.

 

 2~3. 마온에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습니다. 갈멜과 마온은 헤브론 바로 밑에 있는 지역이며 유대 광야와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얼마나 부자였는지 양이 삼천 마리이며 염소가 천 마리입니다. 그 아내는 아비가일이며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갈렙 족속이라고 합니다. 아내와 남편을 비교합니다. 그런데 이 나발이 갈렙 족속입니다. 갈렙은 헤브론 산을 차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문에 나발과 같은 자가 나왔습니다. 히브리어로 ‘갈렙’과 ‘개’라는 자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나발은 개 같은 자라는 워드플레이도 됩니다. 나발의 원래 뜻은 미련한 자라는 뜻입니다.

 

 4~8. 나발이 양 털을 깎는다는 말을 다윗이 광야에서 듣고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어 문안하게 합니다. 문안은 평강을 전하는데 너와 네 집과 네 소유물에도 평강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말은 네 목자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좋은 날에 왔으니 내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나발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를 갖추어 음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요구한 것이 결례가 안 되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으면 또한 나발의 종이 아비가일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소유물을 지켜주었습니다(14~17).

 

 9~13. 다윗의 소년들이 다윗의 이름으로 나발에게 말을 하니 나발의 반응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고 하면서 요즈음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다고 합니다. 나발이 다윗을 모를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을 다윗을 주인의 집에서 도망간 반역자로 모독하는 것이며 다윗의 부하들도 그렇게 모여든 불량한 집단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나발이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와서 이대로 보고하자 다윗은 각기 칼을 차라고 합니다. 자기도 칼을 찹니다. 2백 명은 소유물 곁에 두고 4백 명이 칼을 차고 나발을 심판하기 위하여 나섭니다. 24장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심판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나발을 죽이려고 달려갑니다. 왜 이럴까요?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배당에서 주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고서 돌아서서는 자기 칼을 빼들고 휘두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14~17. 나발의 하인 중 한 사람이 이 모든 일들을 여주인 아비가일에게 보고합니다. 다윗이 자기들을 보호하여 밤낮 울이 되어주었는데도 나발은 그런 다윗을 모욕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려고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18~22. 아비가일이 급히 마련한 음식이 엄청난 양입니다. 이 정도의 음식을 급하게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은 나발이 부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얼마든지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는데도 나발은 오히려 모욕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련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을 모욕한 것입니다. 나발은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소유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을 그저 반역의 무리로 본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나발에게 말하지 않고 종들에게 앞서서 보내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다윗을 만납니다. 다윗이 칼을 차고 내려오면서 이미 한 말은 내가 그의 소유물을 지켜주어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허사라고 하면서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속한 남자는 한 사람이라도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저주의 맹세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 은혜를 모르는 나발에 대하여 분노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발의 양떼를 보호하여 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 양떼들의 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모른다고 나발의 집안의 남자를 다 죽여 버릴 정도의 죄가 됩니까? 만약 다윗의 분노대로 이 나발의 집안사람을 다 죽여 버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발도 갈렙 족속이지만 유다지파입니다. 유다지파의 상당한 세력가인 나발을 그렇게 죽여 버리면 다윗의 명성에 누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의 분노는 이것저것을 돌아볼 틈도 없습니다. 이런 다윗을 막아서는 일에 지혜롭고 아름다운 아비가일이 나섭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이 나선 것은 아비가일의 지혜와 총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32절).

 

 23~31.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엎드려 고합니다. 구약에서 여인의 말 중에 이 본문이 가장 길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은 다윗을 왕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왕이 지금 자기 남편과 자기 집안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고 있기에 그 앞을 가로막아 선 것입니다. 다윗을 주라고 하면서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 이름대로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비가일이 하는 말을 들어보겠습니다(26~30).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아비 가일이 이런 말로서 다윗의 복수의 길을 막아 나섭니다. 아비 가일의 이 말을 들은 다윗의 말입니다.

 

 32~35.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보낸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하며 네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찬송이라는 말과 칭찬이라는 말과 복이라는 말이 모두 ‘바라크’입니다. 찬송하다, 칭찬하다, 복을 받다, 자랑하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36~38. 아비가일이 다윗을 돌려보내고 나발에게 돌아오니 나발이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진짜 왕인 다윗을 모욕하고서는 자신은 왕처럼 잔치를 벌리고 취하여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적절한 말씀이 야고보서 4:9~10절입니다.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런데 미련한 나발은 초라한 다윗을 왕으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 모독하면서 자신이 왕처럼 잔치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 술이 깨고 난 후에 아비가일이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놀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미련한 나발처럼 살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왕처럼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이 따로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면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 마치 다윗처럼 모욕당하는 모습으로 오셨고 다윗보다 더 심한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침을 뱉고 돌아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39~44.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자신의 모욕을 갚아주시고 자신이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게 한 도구는 아비가일입니다(32절). 그래서 아비가일에게 다윗이 청혼을 합니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다윗이 보낸 종들에게 절하면서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라고 하면서 급히 일어나 나귀를 타고 전령들을 따라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여기서 아비가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급히 갑니다. 그리고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사울은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습니다.

 

 미련한 나발과 지혜롭고 아름다운 아비가일의 모습이 어떻게 갈라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는 점에서 갈라집니다. 나발은 다윗을 모욕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완전한 왕으로 영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 지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나발과 같은 모습입니까? 아니면 아비가일과 같은 모습입니까? 나발의 집안에서 아비가일을 보면 어떤 여자입니까? 남편이 죽자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에게 시집간 지조 없는 여자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가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급히 그리스도에게로 시집가는 것이 은혜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다윗과 나단의 마음이 서로 연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붙여주시는 전쟁의 의미를 알았기에 서로 마음이 연락이 되었습니다. 아비가일도 다윗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를 왕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주의 영이 한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부산에서 오신 어느 집사님이 교회가 하나라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혀 처음 만난 사람인데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이야기란 인간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는 복음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9~10절입니다.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목회자의 일방적인 목회 비전에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하는 것으로 같은 마음 같은 마음 같은 뜻이 되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