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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8장 답답한 인생! 2014. 4. 6


28:1~2. 다윗이 블레셋 지역에 망명하여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아기스가 다윗도 함께 공격하자고 합니다. 다윗이 애매하게 대답하지만 아기스는 다윗에게 함께 전쟁에 나가면 영원히 자기의 머리를 지키는 자로 삼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진퇴양난에 처한 지경에 막간으로 사무엘의 죽음과 사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 사무엘이 죽자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를 지냅니다.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레위기 19:31절입니다.“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20:27절입니다.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신접한 자과 박수무당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사울이 한 때는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무엘은 죽었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블레셋에 망명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린 사울만 이스라엘에 남아있을 때에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4~7. 블레셋 사람들이 수넴에 진치고 사울은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을 칩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립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께 묻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습니다. 꿈이나 제사장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거나 선지자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지경입니다. 이럴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세상의 사람들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기도의 능력이 있다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사울이 얼마나 답답하였든지 자기가 쫓아내어버린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엔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갑니다.


8~14. 사울이 변장하고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일종의 초혼(招魂)을 하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켰는데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을 올무를 놓아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이 때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이 일로는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답답하고 급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죄 짓는 일을 맹세하게 됩니다.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올리라는 말을 듣고 사울인줄 알았는지 아니면 사무엘의 모습을 한 자의 모습을 보고 사울을 알았는지 간에 이 여인이 사울을 알아봅니다. 사울이 이 여인에게 두려워말라고 하면서 네가 본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설명하기를 한 노인이 겉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겉옷이란 제사장 복장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합니다.


15~19. 사무엘이 사울에게 왜 나를 불러올려 성가시게 하느냐고 하자 사울이 하나님을 자신을 떠나셨기에 어떤 방법으로도 응답을 하지 않았기에 사무엘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지금까지 한 말들을 반복합니다. 다윗에게 왕위가 넘어갈 것과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폐위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너와 네 두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20~25. 사울이 사무엘의 말을 듣고 기진하여 엎드러집니다. 사무엘의 말로 두려워하는 것도 있지만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응답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금식을 한 모양입니다. 이때 신접한 여인과 부하들이 권하여 음식을 먹고 그 밤에 자기 갈 길로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신접한 여인에 의하여 땅에서 올라온 영이 과연 사무엘의 영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전한 말이 사무엘이 이미 한 말이며 그리고 내일 길보아 전투에서 죽을 것을 말하고 사실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당이 죽은 자의 영을 불러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당이나 점치는 자들에게 가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는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하고 사무엘의 모습으로 와서는 그동안 사울에게 말한 내용을 다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초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접한 여인이 본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였습니다. 얼마든지 사람을 거짓된 것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죽은 조상을 불러내기도 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어 소원을 풀어줌으로 후손이 잘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회를 다닙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합니까?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기도의 능력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 장래의 어떤 문제들도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복을 불러들이고 화를 면하게 해준다는 것의 예언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 무당들이 됩니다.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것이지 자신의 원화소복(遠禍召福)을 위한 예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장래 일을 미리 알지 못하도록 막아두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막아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들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에 목숨 걸고 살지 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언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예언을 말씀의 선포라고 합니다. 구약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합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합니다. 이러한 예언이란 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무당에게 점치듯이 장래 일을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서 7:13~14절입니다.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장래 일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시고 곤고한 날에는 뒤돌아보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여 두셨기에 사람으로 예측하여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예측하면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당에게 찾아가듯이 기도한다는 사람들에게 예언기도 받으려고 가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역대상 10:13~14절입니다. “13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이것이 사울의 평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않아서 죽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는 여기서는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입니다. 그가 묻고자 한 것은 결국 자기의 위신과 체면과 승리를 위한 질문이기에 대답 않습니다(삼상 15:30절 참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무당을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답, 내가 원하는, 나를 위하는 복음을 찾아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1:1~2절입니다.“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이 모든 날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성령이 임하여 성경이 완성된 때입니다. 이제 다른 모양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울 시대는 꿈과 우림과 선지자들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아들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그 아들의 말을 듣고 믿는 것이 참된 예언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그것으로 인하여 보배가 드러나게 됩니다(고후 4: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