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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1장 사울의 죽음 2014. 4. 27


블레셋 사람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이 패배하여 도망하다가 길보아 산에서 엎드려져 죽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울이 자살하였으니 이 사람은 지옥에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전체를 통하여 사울의 죽음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자신과 자기 아들들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여 섭섭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가 원하는 왕을 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사울을 선택하여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으로 보면 사울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왕으로 세우시고는 너희가 원하는 왕의 모습이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8:18~20절입니다. “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너희가 원한 왕이 타락하여 왕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부르짖어도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서도 우리는 왕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을 구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행위가 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과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사울의 일생과 그의 죽음을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그 계시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일어날 수가 없음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왕으로 구원하심을 보여줍니다.


1~7.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배하여 도망가다가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사울 왕과 세 아들도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사울이 적의 화살에 중상을 입어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는 지경에 옆에 있는 사울의 무기 든 자를 보고 자기를 칼로 찌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할례 없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모독을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할례 없는 자에게 죽임당하고 모독 받는 것보다 오히려 부하의 손에 죽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하는 두려워서 왕을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자기 칼을 세워놓고 엎드려져 죽습니다. 무기 맡은 자도 자기 왕을 따라 그렇게 죽습니다. 이것은 왕에 대한 충성이기도합니다.


그러면 왜 할례 없는 자에게 모독당하는 것보다 자살하는 것이 나은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요나단(삼상 14:6)과 다윗을 통하여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골리앗을 보고 다윗이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할례 받지 않는 자에게 죽임 당함이 자살보다 더 수치스러운 죽음이기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 행위에 대하여서 사무엘서 본문에서는 어떠한 윤리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용사로서 죽음을 기억하도록 자신이 만든 조가를 백성에게 노래로 가르치게 합니다(삼하 1장).


7~13.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전쟁에 패한 자들에게서 전리품을 챙겨갑니다. 그 와중에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밷산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밤새도록 달려가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지고 와서 화장하고 그 뼈를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 일을 금식합니다. 이로서 사무엘상이 끝납니다. 사무엘서 에서는 사울의 죽음을 평가하지 않는데 역대 상에서는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역대 상10:13~14절입니다. “13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역대기는 사울의 죽음을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에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울을 여호와께서 죽이시고 그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셨다고 합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한편의 설교가 됩니다. 그래서 사무엘서와 달리 이러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만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 하지 않았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이 밝히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이나 자살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가 죄로 인하여 죽습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그 사람을 지옥 갔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죽는 것도 역대기는 여호와께서 그렇게 죽이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더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저에게 여러 사람들이 자살에 대한 질문들을 했습니다. 저의 답변은 이러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모든 죄인이 다 죽음의 길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고로, 어떤 사람은 병으로, 어떤 사람은 자살로 그렇게 죽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들은 죄로 인하여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이 육신의 죽음은 모두가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리스도 생명이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런 답변을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또 합니다. 그때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이 보시면 어떻게 보시는 것입니까?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자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죽고 싶다는 말과 생각이 난 것은 자살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똑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스스로 죽었다고 하는 자들의 죽음들을 보면 자기 죄로 인하여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살로 보이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사기 9장에서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 사사기 16장의 삼손, 오늘 본문이 사무엘상 31장의 사울과 그의 병기든 자, 사무엘하 17장의 아히도벨, 열왕기 16장의 시므리, 마태복음 27장의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죽음과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배경들은 자신의 죽음조차 수치와 조롱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자살을 선택합니다. 때로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자살합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양심이 괴로워서 자살합니다.

이 중에 가룟 유다를 봅니다.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치고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양심이 베드로보다 나은 양심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주군을 배신하면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사무라이의 정신만 있어도 자살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그렇게 배신하고도 죽지도 않고 다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누가복음 22:32~34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죽기를 각오하였지만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사단이 갖고 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에 비록 부인하였으나 다시 주께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날마다 죽고 싶은데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가룟 유다보다 나아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기도하고 계시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죽는다고 자살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누구의 권세아래 있는지를 몰라서 스스로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데 스스로 한다고 속고 있을 뿐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주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권세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또한 얻으신 것입니다. 스스로 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만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선한 목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이것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얻을 권세를 가지신 그 주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여 내셨습니다. 이렇게 구속을 받은 자들은 자기 목숨을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죽네 사네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의 마침은 인간들이 소원한 왕 사울의 죽음으로 마감되고 사무엘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의 등극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이 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 나 행한 것이 죄 뿐임을 알고 주 예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언약의 완성자인 예수님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골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