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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장 슬픈 노래 2014. 5. 11


사무엘 서를 상과 하로 구분하는 것은 사울의 죽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원한 왕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온전하게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도 사울이 물리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여 기름 부으신 소년다윗으로 물리치게 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였지만 아각 왕을 살려왔고 살진 짐승들을 살려왔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버림받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적들을 어느 정도 막아내기는 하였지만 몰아내어야 할 블레셋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원하여 세운 왕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다윗은 믿을 수가 있습니까? 다윗도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심으로 다윗이 사울보다 나은 면이 나왔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내 버려두시면 간음과 살인을 하며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백성의 숫자를 헤아리는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십니다. 자기 언약에 신실하심으로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는 것이 은혜로 받은 믿음입니다.


1: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 죽이고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에 패배하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의 대적인 아말렉을 공격하여 대승하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잘한 것이 아닙니다. 시글락에 있던 다윗의 사람들이 아말렉에 다 잡혀갔을 때에 다윗이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아말렉을 추격합니다.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아말렉 사람의 종이 병이 들자 버려짐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병든 자가 광야에서 물도 마시지 못하였는데 살아남아있었습니다. 다윗의 길 안내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아말렉을 사람을 쳐 죽이고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2~10. 사흘 째 되는 날에 사울의 진영에서 한 사람이 왔습니다. 옷을 찢어졌고 머리에 흙이 있다는 말은 왕의 죽음을 마치 슬퍼하는 모양으로 보입니다. 다윗에게 와서 엎드려 절하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윗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습니다.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미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쟁터에 우연히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쟁터에 승리한 편이 전리품을 챙기러 오기 전에 잽싸게 그 틈을 노려 전리품 챙기러 온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사울왕의 죽음을 보고 왕관과 팔 고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사무엘 상 31장에서 사울의 죽음이 어떠하였는지 이미 보았습니다. 그 장면과 아말렉 사람의 말과 많이 다릅니다. 사울이 칼에 엎드려져 죽은 이유는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 싫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청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마렉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을 지어내고 다윗에게 사울의 왕관을 들고 온 것은 다윗과 사울과의 적대적인 관계로 생각하여 들고 온 것입니다. 왕관과 팔 고리 보다 더 큰 보상을 바라고 온 것입니다.


11~16.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서 옷을 찢고 저녁 때 까지 슬퍼하며 금식합니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도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어디 사람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말렉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살고 있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울과 다윗의 관계도 잘 압니다. 그 틈 사이를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네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다윗이 그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여 죽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 피가 네 머리에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울의 죽음을 자기 성공의 기회로 삼기 위하여 다윗에게 그 왕관과 팔 고리를 벗겨왔지만 오히려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세상의 일이라면 이 사람이 상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쟁에서 이러한 일이 바로 죽임을 당할 일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끼워 넣으려고 거짓말로 자기 공적을 내세우는 짓이 죽임당할 짓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아브라함과 다윗이 복이 바로 이 복입니다. 그런데 이 아말렉 사람은 여호와의 전쟁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전쟁의 속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저주 받을 자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한 자들도 전쟁에 나가지 못한 자들에게 전리품을 주지 말고 그들의 가족만 돌려주어 쫓아버리자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악한 자와 불량배입니다.


17~18. 다윗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애가를 부릅니다. 이 애가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합니다. 이 노래가 야살의 책에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 외에 이런 이야기들이 기록된 책이 야살의 책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을 공격할 때에 태양을 머무르게 한 사건이 기록된 것도 야살의 책입니다(수10:13). 다윗이 이 노래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게 한 것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자신의 대적의 죽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과 그 아들이 죽은 것으로 애통하는 모습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이 이렇게 한 것이라고 봅니다. 주의 은혜가 있기에 자신의 대적의 죽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에서 쓰임을 받던 자가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생각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19~27.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다윗의 슬픈 노래 속에 다윗 자신의 사적인 이기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적들을 물리치던 용사들의 죽음을 인하여 다윗이 슬퍼합니다. 사울로 인하여 백성들이 적들에게 약탈당하지 않고 붉은 옷과 금 노리개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왕을 위하여 애통하라고 합니다. 또한 요나단의 사랑은 세상의 여인들이 남자나 자녀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보다 더한 사랑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왕위를 포기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용사가 죽은 것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마치 아말렉 소년의 모습은 아닙니까? 나의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께로 왔다면 그것이 오히려 죽임을 당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단지 나의 사적인 이해득실이나 우리 교회라는 이해득실의 관계가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하라고 하였습니다(겔9:4,눅6:21). 오늘 이 땅에 일어나는 가증한 일, 교회 안에서, 우리 안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애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