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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3장 여호와께서 맹세하신 대로 2014. 5. 25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집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로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점점 강하여 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본문의 설교를 보면 우리도 이렇게 해서 점점 강하여 지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 설교의 예를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살 때 많은 일을 겪지만 늘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비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와 그것에 마음의 생각을 모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늘 하나님을 향한 목적으로 우리의 삶을 정렬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비전을 향하여 우리의 몸과 영혼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그 훈련을 통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승리 의식을 가짐으로 다윗처럼 점점 강해지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제목이 ‘점점 강해는 집과 점점 약해지는 집’의 결론입니다.


그 외에도‘아브넬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결론은 아브넬이 자신의 탐욕으로 인하여 죽었다고 하면서 배신자는 망합니다. 배신자 아브넬이 망했고 배신자 유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신실했던 다윗은 점점 더 강성해 갑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신의를 지켜서 강성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는 다윗이 위기를 기회로 선용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기에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잘 선용하라고 합니다. 이런 설교를 모범적 설교라고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서 잘하는 일은 본받고 잘못 하는 일은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39절에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런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입니까? 다윗의 집이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지는 것은 다윗의 훌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온전하게 기름 부으심을 이루어 내시는지 다윗의 실패를 통하여 완전한 기름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2~5. 헤브론에서 낳은 다윗의 아들들과 아내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6명의 아내와 6명의 아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갈과 밧세바도 있습니다. 미갈은 다윗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고 밧세바는 4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에 다시 처첩들을 더 두어 아들만 17명이 됩니다(삼하 5:13~16). 많은 아내와 자녀들은 세상의 시각으로는 왕의 힘을 보여주지만 율법에서는 금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세 가지를 금하고 있습니다. 병마, 많은 아내, 많은 은금입니다(신17:16~17). 이런 율법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기 나름대로 정략적인 결혼도 하고 자신의 탐심을 따라 우리야를 살해하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다윗의 집안에 칼이 끊어지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훌륭하여 왕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자 하신 그 뜻으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하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넬이나 요압이나 이스보셋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기 맹세는 빈틈없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6~1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아갔습니다. 그 결과 사울의 첩 리스바를 아브넬이 범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아브넬이 왕위를 원한 행동입니다.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에 압살롬의 참모였던 아히도벨이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게 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압살롬에게로 돌리게 한 것과(삼하16:21)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다윗의 동녀였던 아비삭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가 솔로몬에 의하여 왕위를 요구한 것으로 여겨져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왕상 2:13~25).


그러므로 므비보셋이 자기 아버지의 첩을 통간한 아브넬을 책망하자 아브넬이 매우 분하게 여기면서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고 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는데 당신이 이 여인에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린다고 합니다. 아브넬은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므비보셋을 왕으로 추대하여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만 지금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혜도 모르는 너 같은 자를 더 이상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이 나라를 다윗에게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맹세는 자기 저주의 맹세입니다. 이 일을 이루지 않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아주 강력한 맹세입니다. 이러한 맹세를 아브넬이 하는 이유는 이미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왕위를 주시기로 맹세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결국 리스바로 인하여 아브넬과 므비보셋 사이가 틀어짐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2~16. 아브넬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면서 언약을 맺자고 합니다. 다윗이 언약을 맺는 조건으로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합니다. 미갈은 자신의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로 정혼 하였기에 데리고 오게 합니다. 이미 사울이 발디엘에게 아내로 주어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둘 사이에 자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 사울의 집안과 적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말을 이스보셋이 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빼앗아 오니 미갈의 남편이 울면서 따라옵니다. 아브넬이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갑니다.


17~21.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다고 하면서 이제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울 사후에 여러 번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브넬 때문입니다. 므비보셋과 충돌이 없었을 때에는 이런 말들을 무시하였는데 이제 므비보셋과의 충돌로 인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다윗을 왕으로 맞이하자고 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야망이 방해를 받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살다가 자신의 뜻이 어그러지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온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돌리자고 합니다. 각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라 행동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넬이 베냐민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나서 이들이 다 다윗을 왕으로 맞이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다윗에게 가서 언약을 맺고 잔치를 열고 평안히 돌아갑니다.


22~30.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물리치고 돌아왔는데 아브넬은 다윗과 언약하고 평안히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요압이 다윗을 책망합니다. 아브넬이 다윗을 공격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면서 다윗 몰래 돌아가는 아브넬에게 전령을 보내어 다시 헤브론으로 오게 합니다. 안심하고 돌아오는 아브넬을 요압이 성문 안으로 들어가 배를 찔러 죽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만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투항해 오면 자신의 자리도 위태할 수가 있기 때문으로도 봅니다. 아브넬은 전쟁 중에 아사헬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헤브론은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서는 피의 보복을 할 수 없는데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요압도 역시 자기의 혈과 육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8~30. 다윗이 그 후에 이 사실을 듣고서는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자신이 무죄하다고 하면서 그 피 흘린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저주를 합니다. 다윗은 요압을 어떻게 처벌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힘이 컸기에 말로만 저주를 합니다.


31~39. 다윗이 요압과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고 하면서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갑니다. 아브넬이 온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돌리면 전쟁할 필요도 없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압의 개인적인 복수로 인하여 위기가 왔습니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하여서 인지 아니면 정말 아브넬을 애도하기 위한 것인지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왕이 소리 높여 울자 백성들도 웁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슬퍼하는데 백성들이 석양에 음식을 다윗에게 가져오자 다윗은 해 지기 전에 어떤 음식이라도 먹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라는 자기 저주를 합니다. 이렇게 함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백성들이 기뻐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이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에게로 돌이키게 된 것은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금식하여 통곡 하였기에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입니까?


다윗은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지만 자신이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이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에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아달라고 합니다. 다윗의 조카들인데도 병권을 쥐고 있으니 다윗도 어떻게 하지 못하여 그냥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금식하며 통곡하며 운 것은 어떤 뜻일까요? 정말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에 대한 울음일까요? 아니면 울고 싶은데 친다는 말처럼 자기 슬픔의 울음일까요? 아니면 다윗의 울음과 금식을 보고서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돌아오게 하려는 계산일까요?


저는 다윗이나 아브넬이나 요압이나 자신의 욕망 따라 살아간 자들이라고 봅니다. 정치가들이나 대형 교회이 목사들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눈물과 애통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넬이 본문에서 두 번이나 말할 것처럼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나 아브넬이나 요압이나 이브보셋이나 자기들의 머릿속 계산기는 돌아가지만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온전히 세워집니다.


사무엘상 23:16~17.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사무엘상 24:20.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은 요나단도 사울도 압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넬도 압니다. 이것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이후에 계속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도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임을 잘 압니다(삼상25:28~30). 심지어 엔돌의 신접한 여인도 다윗이 이스라엘이 왕이 될 것을 말합니다(삼상28:17).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순순히 다윗의 왕위를 인정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 끝까지 반대하는 자도 있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순순히 인정한 자는 요나단과 아비가일 같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들의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잠언 19:21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70억의 인구가 각자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다 있을지라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섭니다. 그 뜻이 다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자기의 왕 됨을 버리는 자들입니다.


빌립보서 2:10~11절입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인정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맹세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가 임하여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이 꿇어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