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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장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2014. 6. 15


오늘 말씀은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실패한 후에 다시 언약궤를 옮기는 내용입니다. 우선 언약궤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고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약궤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시내산 앞입니다. 모세가 언약의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합니다. 피는 생명이기에 생명을 걸고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 언약의 증서를 받기 위하여 모세가 시내산에 40일간 있습니다. 이때 언약의 증서인 돌 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성막과 성막의 모든 기구들에 대한 내용도 여호와께로부터 받습니다. 그런데 이 40일 동안 시내산 아래에서는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었는데 그 신이라는 것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자기들을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언약체결한지 40일 만에 정면으로 배반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언약의 돌 판을 깨뜨려버립니다. 만약 깨뜨려버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의 법대로 다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 판을 받아서 담아둔 상자가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 위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신다고 합니다. 이 언약궤는 지성소에 두었으며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일곱 번 피를 뿌려야 합니다.


이 언약궤가 만들어지고 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따라 가야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보다 약 2킬로미터 앞서 가면 그 언약궤를 따라 가야합니다. 광야를 그렇게 지나고 요단강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닿자 강물이 끊어집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도 언약궤를 앞장세웁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일어남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우상숭배를 합니다. 이때 전쟁이 일어나자 언약궤를 메고 나갔지만 블레셋에 지고 언약궤도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나 언약궤 스스로 적들을 물리치고 돌아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멍에메지 않고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두 암소를 택하여 수레를 메게 하였는데 울면서 벧세메스로 가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재앙이 언약궤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였을 때에 사람들이 언약궤 들여다보다가 칠십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때부터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구별하여 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6:1~5.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동원합니다. 정예병사 삼만 명입니다. 언약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율법에 의하며 제사장이 메고 가야 하는데 새 수레에 싣고 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새 수레에 실어 언약궤를 보낸 것은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갔다는 것은 이방인들의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악기로 연주하면서 언약궤를 싣고 행진합니다.


6~11.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갑자기 소들이 뜁니다. 언약궤가 떨어지려고 하니 웃사가 손으로 언약궤를 붙잡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치시니 그가 언약궤 곁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신 것에 분하여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하는 말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궤를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면서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메어갔습니다. 가드사람이라면 블레셋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에 귀화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이런 이방인의 집에 두게 한 것은 다윗이 왜 언약궤를 메고 가려고 하였는지 그 본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정병 삼만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호위 해가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세우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정병 삼만으로 언약궤를 호위 해 가는 것은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기에 언약궤마저 자신의 성으로 가져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다윗왕의 정통성이 인정이 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메고 와서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대접하느라고 정병 삼만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메고 가려고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절합니다. 거절의 표로 소가 뛰게 하십니다. 웃사가 언약궤를 보호하기 위하여 붙잡았는데 죽여 버리십니다. 웃사의 잘못보다는 다윗의 잘못을 책망하십니다. 물론 웃사도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가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언약궤를 붙잡은 것이지만 이것도 잘못한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자기 집에 언약궤가 오래 있다가 보니 마치 자기가 언약궤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웃사를 치심으로 다윗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는 것인데 다윗이 감히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하려고 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속셈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기에 하나님은 거절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이 화가 나서 언약궤를 가드 사람의 집에 보내버립니다. 네가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다는 심보입니다.


12~15. 오벧 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석 달을 있었는데 저주를 받기는커녕 복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석 달 만에 어떤 복을 받았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만 가축들이 새끼를 잘 낳았다든지 아니면 농사가 잘 되었다든지 하는 소식을 듣고서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메어 오려고 합니다. 이제는 언약궤를 자신이 호위하여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다윗도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입고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자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지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하며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옵니다. 다윗이 기뻐하는 것은 언약궤가 자신과 함께 하여준다는 것에 기쁨입니다. 전에는 자신이 언약궤를 호위하려고 하였을 때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여 주시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기 행위를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16~19.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춥니다. 이런 모습을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심중에 다윗을 비웃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처음에 언약궤를 정병 삼만 명으로 호위하여 갔다면 미갈은 좋아했을 것입니다. 왕의 위신이 높아지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의 처음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려는 모습과 미갈의 모습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멋있게 일하고 싶다는 그 저변에는 다윗의 실패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의 실패한 모습이 마치 성공한 모습으로 착각합니다. 이 세상의 신이 우리를 그렇게 속이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가 삼십 명 목회하는 것과 삼만 명 목회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성공한 모습입니까? 어느 모습이 아내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겠습니까? 다윗과 함께 기뻐한 백성들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자 각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20~23. 다윗도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기 위하여 돌아오는데 미갈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운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었다고 비난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여주심에 기뻐한 모습이 미갈의 눈에는 방탕하고 염치없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미갈에게 다윗이 말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기에 여호와 앞에서 뛰놀겠다고 합니다. 내가 더 낮아져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게 말한 계집종에게서는 높임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김으로 인하여 자녀를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미갈과 전 남편인 발디엘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갈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다윗의 씨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자기와 함께 하여 줌이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체면과 위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이 어린아이가 기뻐서 춤을 추며 노는 것처럼 여호와 앞에서 뛰어놀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사울의 딸 미갈은 왕의 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 낮아져서 비천하게 되어도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면 참으로 기뻐하실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