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0장   은총을 모독한 하눈   2014. 7. 20

사무엘상 9장에서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따라 그 자손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았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남았는데 양 발을 다 저는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모든 땅을 회복시켜주고 므비보셋은 왕의 식탁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여도 할 말이 없는 자인데 왕의 자리에 참여됨을 인하여 자신은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은총을 받은 자의 모습이 이러함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울 때에는 암몬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던 때는 암몬도 다윗에게 복속이 된 상태이지만(삼하8:12) 다윗이 나하스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합니다. 나하스가 다윗에게 언제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그랬는지 아니면 복속이 된 상태에서 다윗에게 반역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떻든 나하스를 생각하여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무엘하 9장과 10장에서 다윗이 은총을 베풀려고 한 형태는 비슷합니다. 그 아버지로 인하여 아들들에게 은총, 자비, 헤세드를 베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자신이 죽은 개와 같은 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심을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눈은 이러한 다윗의 은총을 모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면 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긍휼만이 한량없는 감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언약 밖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를 모독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10:1~5. 다윗의 사절단을 맞이한 하눈의 신하들이 다윗의 사절단이 자기들을 공격하기 위한 정탐꾼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을 깎아 버리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습니다. 이것은 죽음만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율법에서 유대인들은 수염을 깍지 못하게 합니다(레19:27, 21:5). 수염은 남자다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극한 분노와 슬픔을 표할 때는 수염을 잡아 뜯거나 깎기도 합니다(스9:3, 렘41:5). 그리고 제사장 외에는 고대의 유대인들은 속옷을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겉옷을 잘라서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잘라버렸으니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리고에서 왕에게 그런 소식을 전합니다. 왕이 사절단에게 수염이 자라도록 기다렸다가 돌아오게 합니다. 왕의 사절단을 모독한 것은 왕의 은총을 모독하고 거절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전쟁의 선포와 다름이 없습니다. 

6~14. 암몬 자손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을 알고 아람에 용병 삼만 삼천을 고용합니다. 다윗은 요압과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과 아람의 용병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앞뒤로 포위하여 공격해 옵니다. 요압이 이스라엘 군대 중에서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선발하여 요압이 거느리고 용병을 치려고 나가면서 나머지 군대는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의 군대를 치게 합니다. 요압이 아비새에게 말하기를 아람의 용병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암몬이 너보다 강하면 네가 너를 돕겠다고 하면서 담대하라고 합니다. 

12절에서 요압의 신앙적인 자세를 보게 됩니다. 아비새를 격려하면서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성읍을 위하여 싸우려고 나왔으면 당연히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쟁에 나서야 하는데 그 승패의 주권을 주님께 맡깁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요압이 이러한 믿음으로 아람의 군대를 대항하여 나아가니 그들이 도망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암몬 자손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그들의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15~19.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에서 패한 것을 보고 하닷에셀을 중심으로 다시 아람의 군대를 다 모읍니다. 이번에는 얼마나 다윗이 적을 죽인 숫자가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명과 군대 장관 소박을 죽입니다. 다른 보병과 도망간 자들은 계수를 하지 않습니다.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을 죽인 것은 엄청난 대승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다윗과 화친하고 다시는 암몬 사람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절한 하눈을 도우려고 왔다가 패배하자 자신들이 다시 대군을 모아 다윗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대패하여 도망가게 됨으로 다시는 하눈을 도울 마음이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인 단지 군사적인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려는 다윗을 모독한 암몬을 돕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하눈’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그 이름이 몇 사람 나오는데 그 어원이 ‘하난’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쓰일 때 동사로도 쓰이고 명사로도 쓰입니다. 동사일 때는 수동태와 능동태로 쓰이는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면  동정을 받다. 은혜를 받다. 호의를 받다. 베풀다. 은혜를 구하다. 불쌍히 여기다. 긍휼이 여기다. 가련하다. 애걸하다. 부탁하다. 간청하다는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눈의 이름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은총을 베풀려고 하는데 그 은총을 모독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삽니다. 그런데 그런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0:1~18절입니다.“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진멸해야할 가나안 일곱 족속 외에 다른 지역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암몬은 진멸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평화를 선언하는데 받지 않았기에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 원리가 복음을 전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들고 가는 자들이 먼저 평화를 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3:16~21절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5)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5)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5)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6)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요한복음 3:16절만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 단락은 함께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을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7절에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정죄)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죄가 무엇인가 하면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 어두움을 사랑했다는 이악한 행위는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그런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원래 악한 행위임을 어느 누구나가 다 아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악한 행위란 율법적인 자기 의라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일입니다. 이들은 결코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방적인 긍휼을 받아야 하는 자라고 고백을 하지 않는 것이 어두움의 일입니다. 이것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빛으로 나아올 수록 자신은 어두움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므비보셋과 하눈과 대비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왔는데 자신은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나오는 므비보셋과 그 은총을 모독한 하눈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라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한 간구가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를 구하는 자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의 의로 무장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을 두 곳에서 봅니다. 

사도행전 3:13~15절입니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베드로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쳐주었을 때에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볼 때에 전한 내용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부인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이어지는 24~26절입니다.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의 이 증언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도 있었지만 배척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회개한 자들은 주의 긍휼을 바라는 자들이었으며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은 주의 긍휼 곧 주의 은총을 거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4~52절입니다.“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의 복음 증거의 결과입니다. 복음이란 주의 긍휼과 은총과 자비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증거 되는데 누구만 믿게 되는가 하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만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정말로 은혜의 복음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므비보셋과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지만 영생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는 하눈처럼 은총을 모독하는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심판의 기분은 딱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