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1장   다윗의 범죄     2014. 7. 27

11: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팔레스타인 지역은 겨울의 우기 철과 농번기에는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지나고 농번기가 되기 전에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과 그 부하들과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기에 간음과 살인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아람 군대를 다윗이 나아가 대승을 하였고 아람은 더 이상 암몬을 돕지 않기에 요압과 그 군대만 보내어 암몬의 랍바를 에워싸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도 다윗의 신하들도 왕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를 말린 경우도 있습니다(삼하 21:15~17). 

2~5. 다윗이 저녁때에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보암직한 안목의 정욕이 엄습(掩襲)하면 어느 누구도 감당이 안 됩니다. 그동안 다윗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하느라 바쁘기도 하였지만 다윗이 착해서 죄를 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주변을 정복하고 여러 아내를 거느리게 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제 왕의 정점에 이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을 여호와의 율법으로 다스리는 왕입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할 수 없는 왕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왕의 정점에 이르게 되자 사무엘이 경고한 왕의 모습이 나왔습니다(삼상 8:11~19). 이러한 모습은 인간이 죄를 다스릴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창4:7~8).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고 합니다. 헷 사람이라면 가나안 원주민이며 진멸당해야 할 족속입니다. 그런데 이 족속의 일부는 이스라엘에 항복하여 편입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충실한 군인이 우리아입니다. 이 우리아는 다윗의 용사들 중에 삼십 명 안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삼상23:39). 이러한 충성된 군인 우리아의 아내인줄 알고도 간음하고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는 것은 생리가 끝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우리아의 아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리가 끝나면 임신이 잘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생리시작부터 약 2주간이 지나야 배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임신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주석에 의하면 다윗의 죄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임신사실을 알립니다. 이제 다윗은 그 일을 덮기 위하여 머리를 씁니다. 

6~13. 다윗이 요압에게 명령하여 우리아를 자기에게 보내게 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자 별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들을 물어보고서는 네 집에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고 합니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아내와 동침을 하라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왕이 음식물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수비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잡니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면 성전이기에 몸을 정결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몽설을 해도 진영 밖에 나가서 해질 때에 목욕을 하고 들어와야 하며(신23:10) 아내와 동침도 하지 않습니다(삼상21:5). 우리아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군인입니다. 

다음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다윗이 우리아를 불러서 왜 집에 가지 않았느나고 하자 우리아의 말을 11절에서 봅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우리아의 이 말은 지금 다윗의 모든 행위를 그대로 고발하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전혀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윗이 이러한 우리아에게 오늘도 여기 있으라고 하고서 다음날 우리아를 불러 술을 마셔서 취하게 합니다. 그런데 술에 취하여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왕의 부하들과 함께 누워 잡니다. 

14~25. 다윗이 요압장군에게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라는 살인교사를 내리는 밀령을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보냅니다. 비밀문서는 함부로 열어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죽임당할 편지를 들고 요압에게로 가서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아주 맹렬한 싸움의 가장 선봉으로 세워서 몇 사람이 죽는데 여기에 우리아도 함께 죽습니다. 이때 요압이 다윗에게 이 모든 일을 보고할 때에 전령에게 말하기를 다윗이 분노하면 우리아도 죽었다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요압의 보고를 받은 다윗은 요압을 오히려 격려하는 말을 하면서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게 임한다고 하면서 그 성을 함락하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도 모르게 우리아는 전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다윗이 알고 요압이 알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압니다. 밧세바는 남편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러자 다윗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사건을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아가 다윗의 이런 행위를 몰랐을까요? 알았을까요? 우리아가 일반 병사가 아니라 30명의 용사 중에 한 사람이며 그 삼십 명의 용사 중에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아가 다윗의 속셈을 충분히 알아보았을 수 있다는 주석가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저도 전에는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이 본문을 볼 때에 우리아는 다윗이 자신의 아내를 범한 사실을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전쟁터에 나가 있어도 왕과 요압 장군 사이에 전령들이 오고 갈 것입니다. 이미 왕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임신한 사실을 다윗의 측근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우리아를 불러서 일상적인 군대의 안부를 묻는 것은 우리아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아로 하여금 아내에게 들어가도록 왕이 두 번이나 시도하고 더구나 술을 취하게 하여서라고 아내에게 가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눈치를 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1절의 우리아의 이 말은 다윗의 죄를 그대로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 이시다는 뜻입니다. 헷 사람이지만 그 이름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속성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빛이시기에 그 빛 앞에 다윗은 간음과 살인자로 비추어집니다. 다윗이 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알게 됩니까? 사무엘하 12장에서 더 상세하게 보겠습니다만 자신은 죄악 중에 잉태되어 죄악만 생산하는 자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대부분 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 왕이 안일하게 있었다. 직무유기다. 안목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빛의 역할을 하는 우리아에 의하여 다윗이 어두움으로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아는 다윗의 이러한 죄를 알고서도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군인으로 여호와의 전쟁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다윗의 죄를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1:1~4, 9~10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다윗도 자신이 어두움인줄 모릅니다. 이러한 자에게 빛을 비추심으로 자신이 어두움인줄 알게 하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3:19~21절입니다.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다윗이 이렇게 어두움으로 드러나는 일을 빛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 결과로 다윗이 고백이 어떠한지를 봅니다. 

시편 32편입니다.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2)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다윗의 시편인데 무엇이 복이라고 합니까?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그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죄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주의 손이 주야로 누르십니다. 그렇게 하여 죄를 토설하면 주께서 사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를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각주가 있는데 죄를 깨닫게 될 때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빛으로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주실 때에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남이 구원을 받는 자의 복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 복을 바울사도는 로마서 4:5~8절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ㄴ)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편 32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참된 복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드러나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는 자들은 더욱 더욱 그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가려주는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