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3장   죄의 반복성   2014. 8. 10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의 간음과 살인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난 어떤 분이 자신이 성경에서 롤 모델로 여긴 사람이 다윗인데 다윗의 이런 모습이 충격이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3:21~23절입니다.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ㄱ)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글개역이고 한글개정은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다윗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거나 마음에 맞는다는 이 근거는 사무엘상 13:14절과 시편 89:20절입니다. 이 두 곳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는 말씀은 사울보다 다윗이 나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시기에 적당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 왕과 대비되는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그 언약이란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말씀입니다(삼하7장). 그런데 다윗의 행위로는 그 왕위가 영원하기는커녕 다윗 자신부터 끊어져야 합니다. 간음과 살인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왕위를 이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만이 아니라 다윗의 자녀들의 죄도 그대로 드러냄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눅1:31~3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델로 삼을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인물들을 본받으라고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보는 것입니다. 죄의 근원적인 모습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한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의 지식으로 인과율로 모든 사람들 안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든지 일상적인 삶에서 당하는 문제이든지 간에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란 계속하여 반복됩니다. 다윗에게 나타난 죄들이 그의 아들들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간음과 살인이 나타나고 그에 따른 보복들이 나타납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영원한 왕위를 이어주신다는 말씀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집안에 일어나는 칼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다윗의 아내를 이웃이 백주에 범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인과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끈질기게 반복하여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죄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용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죄가 들추어지는 것이 언약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허 선교사님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자아 또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하늘보좌에 까지 뻗혀 있기에 그런 것들이 날마다 들통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지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그만 의지하게 됩니다. 

13:1~2. 암논은 다윗의 장남입니다. 그런데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사랑하여 상사병이 들었습니다. 다말이 처녀이기에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경비를 둔다거나 처소를 다른 곳으로 정하여 두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이것을 압살롬과의 경쟁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다말이 압살롬의 여동생으로 압살롬이 암논 다음의 왕위 계승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중간의 아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름만 나오기도 일찍 죽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압살롬만큼 잘 생긴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인물도 출중하였다고 봅니다. 그런 압살롬이기에 1절에서 다말의 이름보다 압살롬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왕자들 간에 시기와 경쟁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집안에도 죄라는 죄는 다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3~14. 암논에게 친구이며 사촌인 요나답이 아주 간교한 자입니다. 암논에게 다말을 강간할 방법을 알려줍니다. 병든 체 하고 있다가 다윗이 오면 다말이 과자를 만들어주면 낫겠다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암논이 그대로 하여 다윗의 허락을 받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다말에게 암논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어 주게 합니다. 과자를 다 만들자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침실로 들어오게 하여 동침하자고 합니다. 다말이 거절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지만 암논이 강간을 합니다. 

15~22.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후에 그를 심히 미워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고 나니 전에 사랑하던 그 사랑보다 미움이 더합니다. 그래서 쫒아내려고 하자 다말이 강간한 것보다 더한 잘못이 쫓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처녀를 욕보이면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신22:28~29). 그런데도 다말을 쫒아내고 문빗장을 지르라고 합니다. 다말이 끌려나와 재를 뒤집어쓰고 그의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위에 얹고 울부짖습니다. 

20~22. 압살롬이 다말을 보고 네 오라버니 암논이 함께 하였느나고 묻고서는 지금 잠잠히 있으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말이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냅니다. 이제 시집을 갈 수도 없는 신새로 처량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모든 일을 알고서 심히 노하기는 하지만 암논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생각나서라도 암논을 책망하기 못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마음에 암논을 죽일 생각을 가지고 2년을 준비합니다. 

23~29. 2년 후에 압살롬이 자신의 양털 깎는 날에 왕을 초대합니다. 다윗이 거절하자 암논이 함께 가도록 청합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도 압살롬이 간청을 하여 다윗이 허락하여 암논이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압살롬을 암몬을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술을 마시고 잔치하는 자리에서 죽입니다. 다른 왕자들은 노새를 타고 도망갑니다. 

30~39.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들리자 다윗이 옷을 찢고 드러눕습니다. 신하들도 그렇게 하는데 요나답이 암논만 죽었다고 말합니다. 간교한 자임을 다시 보게 됩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자입니다. 압살롬은 자기 외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도망갑니다. 압살롬이 도망간 지 3년이 되었을 때에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합니다. 암논은 이미 죽었기에 그 죽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치 밧세바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씻고 밥을 먹은 것처럼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가정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은 다윗이 범한 죄가 그대로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죄를 지었기에 그것의 보복차원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다윗과 그 가정을 통하여 간음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태도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죽음도, 장남인 암논이 다른 아들인 압살롬의 손에 죽임 당한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다윗이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죽어서 삼년이 되었기에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과 선택을 받아들인 위로입니다. 

사무엘하 13장의 제목을 ‘죄의 반복성’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반복적으로 나오는지 우리 부모들의 죄가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나옵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그대로 내 버려두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 멸망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죄를 들추어내시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의 희생으로만 자기 백성들을 용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볼 때마다 더욱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