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6:15~17:23   계략 대 계략      2014. 9. 14

피곤한 한 주를 보내셨지요! 명절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가족의 사랑, 고향의 그리움, 민족의 정서로 포장을 하지만 피곤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나이 드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오는 것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도 여전히 피곤한 일들이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피곤함을 속히 털어내기 위하여 사람들마다 머릿속의 계산기는 돌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좀 더 큰 규모로 진행이 되면 회사나 국가에서 전략회의 작전회의라고 하고 요즈음은 기획실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 살아남기가 얼마나 피곤한 삶인지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히도벨과 후새 사이에 일어나는 계략의 싸움입니다. 전에 성경은 모략(謀略)이라고 했는데 지금 성경은 계략(計略)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신천지는 각 교회에 추수 꾼을 파견하여 포섭을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거짓말을 일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고 모략이라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성경을 이렇게 한 번씩 바꿈으로 이단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분별할 수 있어서 좋다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모략 대 모략, 계략 대 계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면 사람의 계략이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게 됨을 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의 계략이 무너짐으로 자살하기도 합니다. 

16:15~19.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옵니다. 한마디로 무혈입성(無血入城)입니다. 이때 후새가 왕이여 만세를 부르며 맞이합니다. 압살롬이 후새가 다윗의 친구인줄 알기에 이것이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고 묻자 후새는 자신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전에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이제는 아들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합니다. 후새의 이 말은 분명히 거짓말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무산시키기 위하여 다윗의 비밀 지시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합니까?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 왕에게 거짓말 합니다. 기생 라합도 거짓말 했습니다. 신천지는 자기들의 거짓말을 이런 방식의 거짓말로 보고 모략이라고 합니다만 성경에서 거짓말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를 거짓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후새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0~23. 무혈입성한 후에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으니 다윗 왕이 남겨둔 후궁들과 백성들 앞에서 동침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다윗 왕의 미움을 받는 것이 온 이스라엘이 알게 되면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 질 것이라고 합니다. 반역을 일으켰지만 아직 백성들의 마음은 압살롬을 중심으로 결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하여 압살롬과 함께 한 자들이 더욱 결집하게 될 것이라고 계략을 전합니다. 이 말에 압살롬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 왕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 시행되는 일이기도 합니다(12:11~12). 다윗 왕은 옥상에서 밧세바를 보고 간음을 하게 되는데 그 아들은 옥상에서 아버지의 후처를 동침하게 됩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 저주를 받는 죄가 됩니다. 그 저주란 땅이 토하여 내어버립니다(레18:8, 신27:20). 결국 압살롬은 그 성에서 쫓겨나고 그 땅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모습이 됩니다(삼하18:9~15). 

그런데 23절을 보시면 이런 모략을 내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얼마나 탁월하였으면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이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다고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당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도망가는 중에 어떤 사람이 반역의 무리들 속에 아히도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호와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익히 알기에 기도합니다. 이때 후새가 다윗과 함께 가려고 오는 것을 보고 후새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도록 지시합니다. 기도와 후새의 만남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습니다(삼하15:31~34).  

17:1~4. 아히도벨의 두 번째 모략을 압살롬에게 요청합니다. 자기에게 만 이천 명을 주면 오늘 밤에 다윗의 뒤를 추격하여 다윗만 쳐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탁월한 계략입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이런 기습작전으로 다윗 왕만 죽이면 다윗과 함께 한 자들도 구심점을 잃게 되기에 모든 백성들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는 전략입니다. 이미 왕의 후궁과 동침함으로 자기들과 함께하는 자들의 힘을 결집하였기에 두 번째로는 다윗 편의 사람들은 압살롬에게도 돌이키는 일은 다윗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이 보다 더한 모략 가는 없습니다. 그래서 압살롬도 이스라엘 장로들도 다 좋아하였는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5~14. 압살롬이 후새를 불러서 그의 말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번의 아히도벨의 계략은 좋지 않다고 하면서 왕과 모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왕과 그의 추종자들이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여 있고 다윗은 전쟁은 익숙한 사람이라서 백성들과 함께 있지 않고 은밀한 곳에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왕을 잡기 위하여 수색을 하다가 몇 사람이 먼저 다윗의 신하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면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낙심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전쟁의 영웅이며 다윗의 추종자들이 용사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온 백성의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새의 계략이 더 좋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14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의 계략 과 후새의 계략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15~20. 후새는 이렇게 말한 후에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러한 계략이 왕 앞에서 말하여졌음을 알리고 자기의 계략이 이루어질지 모르기에 왕으로 요단강을 건너 피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아히마스가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 밖에 기다리고 있는 중에 여 종이 그 말을 전합니다. 이것을 본 한 청년이 압살롬에게 알리자 추격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후림의 어떤 집으로 들어가자 그 집의 여인이 이 두 사람을 물이 없는 우물에 숨기고 그 위에 덮을 것을 펼쳐서 찧은 곡식을 늘어두자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여인도 거짓말로 두 사람이 시내를 건너가더라고 속입니다. 그 사람들이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21~23. 두 사람이 다윗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요단강을 다 건너갑니다. 아히도벨은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아히도벨이 왜 이렇게 죽었을까요? 지금까지 자기의 모략을 이긴 자가 없습니다. 압살롬이나 다윗 왕이나 간에 아히도벨의 모략을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모략처럼 여겼습니다. 즉 사람의 모략이 아니라 신의 한수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으로 보고 자살을 한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제 압살롬이 패할 것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뛰어난 모략에 자기에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라는 것들을 어리석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실패한 인생으로 보입니다. 맨발로 머리를 풀고 울면서 아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다윗을 누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보겠습니까? 다들 돌아서서 압살롬에게 가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15:12~13절을 보시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청하여 갑니다. 그러자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아집니다. 아히도벨이 어디로 가느냐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령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하기 전에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 한 것도 있지만 아히도벨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게 하시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할 수 없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시편 5:1~12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1)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2)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다윗이 아히도벨의 계락을 헛되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 배경으로 보시면 이 시편에서도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지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ㄱ)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2)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구원을 받는 자만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6~31절을 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세상의 모든 지혜라는 것들은 세상을 사는 일에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잘 난 자들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아무 육체도 자랑 할 것이 없게 하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8~23절입니다.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ㄱ)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ㄴ)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는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란 것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아히도벨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 머리와 지식과 지혜를 믿고 사는 그 결국은 이미 죽은 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이 볼 때에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만 의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