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7:24~18:33  마하나임과 압살롬의 죽음    2014. 9. 21

지난주에 계략 대 계략에서 여호와의 뜻이 세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지게 하시고 후새의 계략이 채택되게 하셨습니다(삼하17:14). 우리도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계획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말씀 앞에 정지시키고 말씀을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면서도 늘 자기중심적으로 말씀을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잠언 19:21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삼하17:24~29.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모아서 함께 요단을 건넙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하는 동안 다윗은 마하나임 성에 이르러 군대를 정비하고 압살롬의 군대를 막을 준비를 합니다. 압살롬의 군 지휘관으로 요압의 조카인 아마사를 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에 진ㅇ르 칩니다. 그런데 다윗이 마하나님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의 사람들과 길르앗 바르실래가 여러 가지 물품과 곡식들을 다윗에게 가져옵니다. 암몬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으로 쫓겨났다면 다윗을 배척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을 대접하는 것은 웬일일까요? 마길 같은 사람은 므비보셋을 보살피던 사람이라서 다윗이 므비보셋을 잘 돌봐주었기에 그렇게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윗이 조공을 바치는 나라이지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도 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곳의 지명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창세기 32:1~2절입니다.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마하나임이라는 지명이 처음 붙여지는 곳입니다. 야곱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끌고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그들을 보고 그 땅 이름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의 마하나임으로 불렀습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집에서 도망하여 벧엘로 올라가는 중에 만난 위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것이 바로 마하나임의 이름이 붙여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환도 뼈가 위골되어 평생을 지팡이 의지하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에서와 야곱이 화해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여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마하나님으로 피하여 왔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형제간 싸움에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따라 야곱을 도와주셨습니다. 야곱의 온갖 계략들에 대하여 창세기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이러한 야곱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셨다고 합니다. 호세아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하여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12:1~6절입니다. “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환도 뼈가 위골되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벌과 보응으로 되어있지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언약으로 다루시는 모습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히12:1~13).  그리고 죽을 때에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여호와를 경배합니다(히11:21).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지팡이를 의지하여 살아야하는 인생이 이스라엘입니다. 마하나임에서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되지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치시지만 그가 언약을 인하여 생명이 보전되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 마하나임에서 자기의 아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허리에서 나온 아들입니다. 비록 다윗의 범죄와 그 징계로 인하여 이런 일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듯이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언약을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지만 다윗은 에돔 사람과 길르앗 사람들에게 공궤(供饋)를 받고 있습니다(삼하17:27~29). 그리고 전쟁도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기게 된 것은 다윗의 용사들의 작전이 아닙니다. 

삼하 18:1~5. 다윗의 군대를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를 장군으로 한 세 부대로 나눕니다. 왕이 함께 전장에 나가겠다고 할 때에 백성들이 왕은 성안에 있도록 합니다. 적은 우리가 절반이 죽어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따라 압살롬을 벌하시는 중입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는 자들에게 다윗은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합니다.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6~18. 압살롬의 군대가 패배하고 전사자가 이만 명에 이릅니다. 그런데 칼에 죽은 자보다 수풀에서 죽은 자가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의 결과입니다. 여호수아 10:11절에서도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많았다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이 패배하여 도망가는 중에 그의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노새는 빠져나갑니다.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렸으면 철봉 하듯이 손으로 빼고 나오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이 무성한 나뭇가지에 얽힌 것으로 보입니다. 숲에서 압살롬의 군대가 죽은 것도 가시덤불 같은 나무들과 수풀의 구덩이 같은 지형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자로서 그 머리카락까지 자랑되었던 자가 그 머리카락에 나뭇가지에 걸려서 죽음으로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됩니다. 다른 용사가 압살롬을 다윗을 생각하여 죽이지 못하자 요압이 창으로 그를 죽이고 압살롬을 돌무더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자 반역한 무리들은 다 흩어져 버립니다. 이로 인하여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아들이 없음으로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자식이 세 명이 있었지만 일찍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웠던 자는 공중과 땅 사이에 매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19~32. 전쟁의 승리를 다윗에게 전하여야 하는데 아히마아스가 가겠다고 하자 요압이 말립니다. 이 소식으로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구스인을 보냅니다. 사울의 죽음을 알린 아말렉 소년이 죽임을 당하였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온 레갑과 바아나도 죽임을 당한 것을 요압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구스인은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스인이 가고 아히마아스가 자기도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하니 구스인보다 더 앞질러 다윗 왕에게 보고하면서 압살롬의 죽음을 알리지 않습니다. 구스인이 도착하여 압살롬의 죽음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한 다윗왕의 탄식을 봅니다.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전쟁의 승리가 기쁨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죽음으로 애통해 합니다. 이것은 단지 혈육의 죽음만으로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 죄로 인하여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병들었을 때는 울고 금식하였는데 죽고나자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는 이제는 웁니다. 그러면서 하는 고백이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좋겠다고 합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자를 향하여 이런 탄식은 단지 혈육의 정이 아니라 자기 죄를 아는 자의 탄식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서 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부르는 모습이 겹쳐집니다. 늘 하나님을 반역만 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신 주님은 정말 자신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마하나님의 여호와 전쟁은 피아간의 죄를 다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이러한 눈물의 골짜기입니다(49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