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9장    왕의 귀환       2014. 9. 28
  
다윗 왕이 다시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는 내용이 19장입니다. 다윗이 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도망갈 때에 다윗 주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앞에서 보았습니다. 다윗을 배반하여 압살롬의 편에 서는 자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다윗의 편에 서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를 불러들이면 언약궤를 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자신은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모습이 어떤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우리들의 죄가 어떠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자기 언약으로만 일어납니다. 

19:1~8. 압살롬의 죽음에 슬퍼하는 다윗을 향하여 요압이 백성들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기는 자기의 마음도 들어있습니다. 자신이 압살롬을 죽였는데 왕이 저렇게 슬퍼한다면 자신이 왕의 반역을 죽인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기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왕을 압박합니다. 왕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왕이 젊어서 지금까지 당한 화보다 더 심한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백성들이 다 왕을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는 군사들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과 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데 요압은 자신이 다윗을 위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는 것으로 압박합니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달라고 한 다윗의 부탁을 무시하고 창으로 찔러 죽인 요압이 왕도 압박합니다. 이러한 요압의 자세는 왕을 위한 충성이 아니라 자기의 권력과 자존심을 위한 것임이 나중에 반역에 가담함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충성이라는 것도 그 가면들을 벗겨내면 그 안에 온갖 욕망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8하~10.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압살롬을 따르든 자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그들이 압살롬을 기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세웠지만 이미 죽었으니 다시 다윗 왕을 모셔오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변론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직 다윗을 반대하는 자들도 상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다시 왕으로 귀환하면 압살롬의 편에 선 자들을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손익계산들이 분주한 상황입니다. 

11~15. 이러한 때에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연락을 하여 유다 장로들에게 말을 전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을 다시 모셔오자고 하는데 왜 너희가 왕을 모셔오자고 하는 일에 나중에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요압의 자리에 세우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골육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유다지파의 마음만이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한 자들에 대하여 유화책이 됩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왕에게로 기울게 합니다. 다윗 왕이 쫓겨 갈 때에 하나님의 언약에 자신을 맡기겠다고 하면서도 사독과 아비아달을 성에 남게 하고 후새를 성으로 보내는 것이나 지금 백성들의 마음을 기울게 하는 것이나 간에 왕은 자기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일로 인하여 나라가 분열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함을 40절 이하에서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유다 지파가 우선으로 다윗을 모시기 위하여 길갈로 갑니다. 

16~19. 시므이와 시바가 다윗을 가장 먼저 마중나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도망갈 때에 저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이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 베냐민 사람 천명을 동원하여 왔습니다. 시바도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이 함께 와서 다윗 왕이 요단을 건너는 일을 돕습니다. 이 두 사람이 왜 이렇게 하였을까요? 자기들의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심하게 저주하였습니다. 시바는 거짓말로 므비보셋의 재산을 다 차지하였습니다. 왕이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렇게 살아서 귀환하고 있으니 제일먼저 와서 용서를 구합니다. 

20~23. 이때 아비새가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를 저주하였기에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스루야의 아들들아 어찌하여 나의 원수가 되느냐고 합니다. 다윗이 도망갈 때에 시므이의 저주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주하게 하셨으니 그대로 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긍휼을 베푸셨기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비새를 향하여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야고보서 2:13절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베드로전서 2:10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24~30.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맞이합니다. 다윗 왕이 므비보셋에게 자신이 피난갈 때에 왜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종 시자가 자신을 속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재산을 시바와 네가 절반으로 나누라고 합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왕이 평안히 돌아왔기에 자신은 되었다고 하면서 시바로 그 재산 전부를 차지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왕이 귀환하기 까지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다고 합니다.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도 왕이 돌아왔으니 재산도 의미 없다고 합니다. 므비보셋의 이런 모습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 므비보셋은 다윗 앞에 자신은 죽은 개와 같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마음이 그대로였다면 다윗이 쫓겨나가고부터 지금까지 왕을 기다린 것은 마땅한 자세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왕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영이 임한 자는 그 영이 종말을 알려줍니다. 이미 이천년 전에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종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자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 경기도에서 천국 상급론에 대하여 질문한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은 상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은 자신은 열심히 노력해서 10고을 차지 할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제가 열 고을 차지한다거나 달란트의 비유들은 누가 종말의 영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지를 말씀하는 것이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죽은 개와 같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살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므비보셋의 태도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31~38. 마하나임에서 바르실래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르실래가 다윗 왕을 요단강 건너게 하려고 다시 와서 도와줍니다. 그러자 다윗이 자신과 함께 왕궁으로 가자고 합니다. 자기 나이가 팔십이라고 하면서 왕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단지 왕을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려는 것이어늘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갚으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저 자신은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을 것인데 왕이 원하시면 김함이나 데리고 가시면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왕이 도망 갈 때의 사람들의 태도와 왕의 귀환에서 사람들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시므이와 시바와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도 누구를 본 받아 살자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를 중심으로 어떻게 분류가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분명히 이용하는 자들인지 정말로 십자가를 사랑하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40~43. 왕이 길갈로 건너오는데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넙니다. 왕이 도망갈 때에는 몇 천 명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의 귀환에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합니다. 이때에 주도적인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그래서 온 유다지파가 앞장섭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지파를 자극하였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나를 왕으로 다시 모셔오려고 하는데 왜 유다지파가 머뭇거리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유다 지파와 다윗을 모셔오는 일에 앞장을 섰지만 이로 인하여 반 유다지파의 형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왕이 자신의 종친이라고 혈과 육으로 분리합니다. 혈연을 따지면서 큰소리칩니다. 그러자 유다가 잠시 강경하여 이기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로 인하여 다시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20장입니다. 왕의 도망과 귀한에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자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하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리 곁길로 피해도 마음속에 주의 영이 오십니다. 그러면 더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의 영으로 인하여 십자가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52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