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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15~27 은혜와 거래 2016. 3. 6

 

지난주에 나아만의 고침 받는 장면까지만 봤습니다. 이방인 나아만의 나병이 고침을 받는 장면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나병이 든 상황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통하여 은혜가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이러한 나아만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실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누가복음 4:27~30절입니다.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희년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냄을 받았고, 엘리사 시대 때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나아만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시자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아만 사람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이런 모습이 나병환자가 된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어떻게 합니까?


15~16절입니다.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나아만이 병 고침을 받고 나서 엘리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물을 엘리사에게 드리려고 하자 엘리사가 거절합니다. 왜 거절하는 것입니까? 참된 신은 사람에게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거래와 흥정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엘리사는 나아만과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에게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대가로 거래하려고 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2~25절입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나아만의 종교성은 자신들의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심을 보여줍니다. 바울사도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과 엘리사가 나아만의 선물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의 내용입니다. 지난 금요일 이영순 권사님이 아는 권사님 한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성경공부 후에 교제를 좀 했습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시는 말씀에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더니 참 내 안에 계시지요!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배당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산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짐이 가벼워집니까? 무거워집니까? 질문을 하니 짐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면 짐이 무거워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함께 보았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지만 목사님들이 또 다른 말씀을 가지고 이런 것이 이런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의무감만 지운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예물을 받지 않는다는 엘리사의 말에 나아만이 다른 것을 요청합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17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선물을 받지 않는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가서 자신은 오직 그 흙 위에서 여호와께만 번제와 희생제물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지고 간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나아만을 통하여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청을 합니다. 왕이 림몬의 산당에 몸을 굽힐 때에 나아만의 손을 의지하기에 그것을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신부 절 시키는 사람이 함께 절하듯이 그런 행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평안히 가라고합니다. 이를 통하여 지금 이스라엘이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22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스스로 이르되이게 망하는 생각입니다만 자신은 스스로 말하는 일이 아주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어느 정도로 합당하게 여겼습니까? 20절 끝에 보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그렇게 맹세한 내용은 그에게서 무엇이든지 받아내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기를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무엇입니까? 게하시는 스스로 말하는 것이지만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한 것은 스스로 한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계시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엘리사가 다른 예물은 받았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서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선지 생도들이 삶의 열악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예물을 받지 않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를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거래로 생각하는 자가 게하시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게하시가 나아만의 일행을 따라잡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나아만이 게하시를 보고서 수레에서 내려서 영접합니다. 게하시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동등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평안이냐고 묻자 게하시가 평안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라고 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게하시는 이 정도는 받아도 충분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게하시의 생각이 바로 거래하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옛날 정부부장 이후락씨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떡을 만지면 떡 고물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금액이 좀 커서 문제가 되었지만 내가 이 정도로 하였으니 이 정도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다 하고 있습니다. 게하시의 생각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병 고쳐주고 돈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가 스스로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사로 예물을 드리겠다고 하는데 엘리사는 나아만을 내다보지도 않고 거절함으로 엘리사 자신이 고쳐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이런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알았기에 이제 평생토록 여호와만 섬기려고 그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는 땅의 흙을 가져가서 여호와를 경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그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여호와 경배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배함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이런 거래와 흥정이 여호와의 언약의 땅을 더럽히는 나병환자의 부정함과 같습니다.


23~25절입니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게하시가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구하였는데 나아만은 은 두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심부름 하는 게하시에게 넉넉하게 예물을 주었습니다. 이 양이 얼마나 되는지 두 전대에 넣어 맬 정도입니다. 게하시가 사환 둘을 데리고 갔습니다. 두 사환에게 지우게 하여 가다가 언덕에 이르러 그 물건을 두 사환에게 받아서 자기 집에 감춥니다. 두 사환을 돌려보내고 엘리사 앞에 섭니다. 엘리사가 다 알고 어디서 노느냐고 물으니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26~27절입니다.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기에 말하기를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고 합니다. 게하시기 이런 것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록을 엘리사가 말하는 이유는 게하시기 그 두 달란트의 은으로 이런 것들을 사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돈이 들어오면 무엇을 할 생각인지 게하시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상태는 가뭄과 적의 침략으로 어려움이 겹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와야 할 이스라엘이 온갖 우상숭배로 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단과 벧엘에 여호와 성전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이 섬기는 이런 하나님은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이방신들처럼 거래하고 흥정하는 신으로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나병이 든 상태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하여 나아만을 보냈습니다. 이방인의 나병은 고침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는 나병이 들어버렸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래하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상태임을 고발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여호수아서에서 아간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장서신 싸움인 가나안 정복에서 첫 성 여리고의 모든 전리품을 여호와께 바쳐진 것입니다. 여호와께 바쳐진 것은 진멸이 대상이기에 그것을 취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아간은 그 전리품을 자신이 취하였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약탈 전쟁입니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적을 공격하여 그들의 보물들을 취하여 오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취하는 것도 있지만 사적으로도 챙기는 것입니다. 내가 전쟁에 나가서 수고를 하였으니 당연히 나의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간도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들어가는 약속의 땅에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는 아간은 게하시와 같음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8:18~25절입니다.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3)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시몬은 마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그 말을 전심으로 믿고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빌립의 말을 듣고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믿는 것 따로 성령 임하는 것이 따로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사도들도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선민사상을 무너뜨리는 것이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 되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사도들에게 확인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5장에서 베드로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의 기도하고 성령 임하는 것을 보고 그런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한 사람이 시몬입니다. 그래서 성직매매(simonism)라는 어원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사려고 했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아간의 저주와 게하시의 저주가 함유된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인간의 혈육의 정성과 노력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으로는 이 복음 곧 십자가의 도에 아무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자 시몬이 기도하여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만 용서를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언급은 없습니다.

 

유다서 3~4절입니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작년 봄 수련회 때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일반으로 받은 구원 즉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오직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망치려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한번 구원받은 몸이니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전에 번역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일에 사용해 먹고 있겠습니까? 물론 복음을 처음 들을 때에 종교성이 무너져 내림으로, 그러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하면서 방황 할 수는 있겠지만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의 결국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래하거나 흥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그 은혜를 주신 분이 고맙고 감사하여 그 분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자는 더욱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