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8:22~27 임마누엘의 약속 2017. 11. 26

 

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 하여 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지난주에 이어 아하스 왕의 대한 내용을 봅니다. 아하스 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다가 곤고하면 일반인이라면 무언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을 하든가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신에게 잘못한 것을 회개를 할 것인데 아하스는 곤고할 때에 더욱 범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범죄란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아하스 왕이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이사야서에서 다시 보겠습니다만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자 유다의 아하스 왕은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모아 앗수르 왕에게 바칩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이 아람과 사마리아를 공격합니다. 앗수르 왕이 다메섹에 있을 때에 아하스가 앗수르 왕을 보러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메섹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보고 그림을 그려 유다의 제사장에게 미리 보냅니다. 왕이 돌아와서 그 다메섹 신들의 제단에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곤고할 때에 더욱 범죄 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16~19절을 봅니다. “16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구하였으니 17 이는 에돔 사람들이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의 백성을 사로잡았음이며 18 블레셋 사람들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노하여 벧세메스와 아얄론과 그데롯과 소고 및 그 주변 마을들과 딤나 및 그 주변 마을들과 김소 및 그 주변 마을들을 점령하고 거기에 살았으니 19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에돔과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를 치고 백성을 사로잡아 갑니다. 그러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청합니다.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이 유다를 공격하였을 때에 도움을 요청하였기에 이 사건과 연결된 것인지 두 번에 걸친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옛날에 원병을 요청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열왕기하 16장의 사건이 먼저이고 지금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은 두 번째로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유다 왕이 다메섹의 신들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기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십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오히려 앗수르 왕을 의지합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20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21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나라 생각이 납니다.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도움은커녕 얼마나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까? 임진왜란 때에 명의 도움을 구하였을 때에 명나라가 군대를 파병하였지만 백성들의 피해가 얼마나 엄청났는데 유성룡의 징비록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을 굶어죽어 가는데 명군은 백성들의 소를 잡아먹었습니다.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다시 의주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지금도 외세에 휘둘리고 있는 지경입니다.

 

우리나라는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아니기에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이라는 소설과 영화에서도 이런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버리고 외세를 의지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를 낮추시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의지하기는커녕 계속하여 죄를 더욱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왕의 모습을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언약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로는 특정한 국가가 언약의 나라가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이방의 왕을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하는 것을 교회에 적용하면 됩니다. 교회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수나 돈이나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교회가 망하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본문 22~26절입니다.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 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한 것입니다. 다메섹은 앗수르에 망하였는데도 그런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이 결국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그 신이 망하게 한 것이라는 말은 그런 신을 의지함으로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은 것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서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하스가 죽자 이스라엘의 왕들의 묘실에 묻지 않고 격을 낮추어 예루살렘 성에 장사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아하스 왕이 구원받았을까요?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까요? 성경은 구원론 중심으로 보면 성경이 풀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아하스를 보고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힘이 되는 돈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재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아하스가 우리보다 더 악한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가 아하스 보다 더 악한 죄인임이 인식된다면 그런 자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사야 7:1~9절입니다.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1)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람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너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에게 가서 적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합니다. 아하스의 왕과 백성의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 마음에 바람에 숲이 흔들림같이 파르르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정녕 서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앗수르에 원병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12절을 봅니다.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아하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시기를 적이 물러갈 징조를 구하여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불신의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하겠느냐며 오히려 앗수르 왕을 신뢰한 것입니다.

 

13~14절입니다.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2)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다윗의 집 곧 아하스가 지금 왕으로 있는 곳이 다윗의 집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한 일이 사람을 괴롭게 한 것도 큰일인데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고 나의 하나님을 괴롭게 하느냐고 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징조를 구하라고 하여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주시는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약속은 불신의 끝자락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사야 8: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1)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 내가 2)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1)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임마누엘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짓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는데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갈 것이라고 합니다. 아하스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앗수르 왕에게 성전과 왕궁의 은과 금을 보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유다도 앗수르에 노략을 당합니다.

 

이어지는 5~8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렸다는 것은 약해 보이는 유다의 하나님을 버리고 강해 보이는 앗수르의 왕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앗수르 왕이 유다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고 노략하여 가고 이스라엘의 여러 지역을 앗수르가 차지한 것을 역대하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앗수르가 크고 강한 강물처럼 흘러 넘쳐 유다에 들어와서 목에까지 미치는데 이 때에 임마누엘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할 것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약속이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믿지 않은 아하스 왕 때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연결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남은 자를 남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약속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남은 자를 구원하여 내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1:21~23절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예언 성취의 배경이 오늘 본문에서 본 아하스 왕 때입니다. 겉으로 보면 앗수르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 모습인데 그 곳에서 임마누엘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이름을 통한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루어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노략을 당하여 망하게 된 자리에서 남은 자가 나옵니다. 남은 자는 자신이 노략을 당하여야 마땅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임마누엘하십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아하스 왕 때에 임마누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로마서 5:19~21절입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