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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장 2012. 6. 3


여호수아 2장은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은 것과 여리고 성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기생 라합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정탐꾼과 라합 사이에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진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수아가 40년 전에 모세의 보냄을 받은 12명의 정탐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믿음이 없는 보고를 함으로 이스라엘로 낙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40년을 광야 생활을 통하여 그 믿지 못한 자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고 그 2세대들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민13장14장). 이제는 여호수아가 두 명을 은밀하게 보냅니다.


1-14절입니다. 두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과 이를 눈치 챈 정보원들이 보고하고 잡으러 오는 긴박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라합이 이미 눈치를 채고는 옥상 삼대 늘어놓은 곳에 숨기고서는 거짓말을 합니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고 해지기 전 성문을 닫기 직전에 성을 나갔으니 빨리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추격꾼들이 급하게 나가자 성문이 닫혔습니다.


8-14절입니다. 두 정탐꾼이 잠들기 전에 라합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으며 홍해를 가르고 건넌 것과 요단 건너편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을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이 진멸전쟁입니다. 히브리어로 ‘헤렘’이라고 하는 진멸전쟁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여리고 성의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생 라합은 내가 선대하였으니 너희도 나를 선대하여 그 표를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언약과 약속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약 250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다고 하실 때는 하나님의 인자가 담기기에 이 ‘헤세드’를 언약적사랑이라고 합니다. 12절의 선대와 14절의 인자라는 단어가 같은 ‘헤세드’입니다. 이 언약으로 체결하면서 라합의 자기 가족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정탐꾼들은 이 일을 누설하지 않으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목숨을 건 언약을 맺습니다.


15-21절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을 달아 밖으로 보내면서 어떻게 피신하여 갈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그 정탐꾼들이 붉은 줄을 주면서 이 줄을 이 창문에 달아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가족을 다 집안에 들여놓고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나가면 그 사람의 피는 그 머리로 돌아갈 것이며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붉은 줄을 맨 집안에 있는데 누구든지 손을 되면 그 피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22-24절입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자세히 고합니다. 이 두 정탐꾼의 보고는 이러합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라고 보고합니다. 이로서 두려웠던 여호수아가 힘을 얻을 뿐 아니라 모든 백성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게 됩니다.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동일한 이스라엘의 소문을 들었는데 어떻게 기생 라합만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을 숨겨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시에 적의 첩자를 숨겨주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출애굽과 홍해를 말리고 건넌 것과 아모리 왕들을 죽인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지언정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는데 기생 라합은 그 하나님께 항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한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탐꾼을 숨겨주면서 언약의 표로 붉은 줄을 매는 것은 마치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집안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안은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처음 태어난 수컷이 다 죽임을 당하는 것과 연결하여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 유일하게 이 집만이 살아남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효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붉은 줄을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연결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교부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줄을 보혈과 연결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수많은 사건들을 전부 예표와 그림자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표와 그림자로 해석하는 것만 예표와 그림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레고리로 풀어 가면 신천지 식의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붉은 줄이라고 해서 바로 보혈로 연결하지 않아도 정탐꾼과 라합 사이의 언약의 표라고만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 줄은 라합에게는 소망의 줄입니다. 히브리어로 ‘줄’이라는 단어와 ‘소망’이라는 단어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붉은 줄이라는 것을 언약을 맺은 표시로 보면 됩니다. 붉은 색만 나오면 마치 보혈을 말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맺는 것은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데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조국을 배신하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라합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5-6절입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기생 라함이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라합의 남편 살몬은 유대 전승에 의하면 두 정탐꾼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살몬과 라합에게서 보아스가 나오고 보아스는 또 이방 여인 룻에게서 오벳을 낳습니다.


마태복음 족보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 4명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하는 식으로 남자에게서 남자로 연결되는데 특별하게 여자의 이름을 넣을 때에 누구 ‘에게서’라고 합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다말, 라합, 룻,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밧세바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라고 되어 있기에 밧세바 보다는 우리야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네 명의 여자 중에 이방인이 세 명이나 들어있습니다. 다말은 이방인으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라합은 창녀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으로 과부였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이런 족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1:31-32절입니다.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11:30-31절입니다.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기생 라합의 믿음을 말합니다.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이스라엘을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서 다른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받은 믿음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은 믿음은 조국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25-26절입니다.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가 오직 은혜라고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행함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데 기생 라합이 받은 행함 있는 믿음이 어떤 모습입니까? 목숨을 걸고 조국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행함 있는 믿음을 말하는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에 속한 무엇을 배신 한 것이 있습니까? 단지 윤리 도덕적인 몇 가지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행하였습니까? 아니면 교회의 일이라는 것을 몇 가지 더 행하였습니까? 그런 것을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을 여리고 성의 진멸전쟁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칼을 들고 여리고 성을 진멸하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빼들고 여호수아 앞장서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두 정탐꾼이 간 것은 정탐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간 두 증인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정탐은 이미 여호수아가 40년 전에 하였습니다. 이제 진멸 앞에서 그 성에 하나님의 택한 자가 있었기에 두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칼을 들고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0:1-12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십니다. 복음을 전하되 영접하면 그 집에 머물고 영접하지 않으면 그 발에 먼지도 떨어버린다고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표가 되며 이렇게 두 증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네에 소돔보다 더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돔 성에 두 천사가 들어갔을 때에 롯이 영접합니다. 이 두 천사도 정탐꾼 이었습니다. 소돔 성이 어떠한지 보러온 것입니다. 여리고성에 두 정탐꾼이 들어갔을 때에 기생 라합이 영접합니다. 소돔성도 진멸 당하였고 여리고성도 진멸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소돔성에서 롯과 두 딸입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기생 라합의 가족입니다. 이들은 다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는 무엇을 전하여야 합니까? 지금 당신이 꿈꾸고 희망하며 살고 있는 곳이 진멸당한 소돔이며 여리고 성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서 탈출하라고 전하여야 합니다. 과연 이런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자들은 세상을 배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전도와 이런 믿음이 아니라면 전도가 아니라 사람 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프란시스 쉐퍼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라합이라는 이 여인은 그녀를 둘러싼 문화 전체에 홀로 맞서며 믿음으로 서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서구 세계에 사는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아직 이렇게 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던 일이다. 그녀는 여리고가 함락될 때까지 상당 기간 동안 보지지 않는 것을 위해 보이는 것과 맞섰다. 여리고 왕이 그녀가 한 짓을 알아냈더라면 그는 그녀의 가장 무시무시한 적이 되어 그녀를 처형했을 것이다.....이것이 정확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이며, 라합은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어둠의 나라에 빠져나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에게 통제되는 문화에 에워싸여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심판이 있을 때까지 그 문화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한때 우리의 왕이었지만 이제 우리의 원수가 된 자에게 에워싸여 있다. 적의 영토에 살면서 영적인 전투를 기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쉐퍼는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으로 말합니다(골1:13).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까? 세상을 배신할 마음이 없다면 아직 옮겨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13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게 하는 선지자나 가족이나 한 성읍이라도 죽이고 진멸하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시 계산 해보시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눅14:25-35). 아니라면 지금 돌아서는 세상 적으로 손해를 덜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