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7:1~89 장막 세우기 2020. 5. 17

 

1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1)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지난주는 제사장의 축복을 보았습니다. 제사장이 축복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비추어 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라고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장막(帳幕)에 대한 계시를 받습니다. 이 장막은 하늘 장막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이런 물질로 된 장막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장막과 그 기구와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그래서 이 장막을 거룩하다고 성막(聖幕)이라고 하고(26:1), 하나님과 만난다고 해서 회막(會幕)이라고 합니다(27:21). 물론 백성들도 회막 중심으로 모입니다. 오늘은 이 장막 세우기를 마치고 봉헌하는 과정을 통하여 차별 없는 헌물과 마지막 89절에 하나님과 만나주시는 언약궤 위의 속죄소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봉독 장막 세우기를 마쳤다는 것은 장막을 완성하였다는 말입니다. 장막 봉헌식의 날입니다. 이 날에 장막과 각종 기구에 기름을 발라 구별을 합니다. 장막의 재료는 다 지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막과 기구에 기름을 바름으로 구별하는 것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 재료인 장막이 성막이 되는 것은 성막에서 하는 일이 구별된 일입니다. 성막에서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는 피가 흘려야 합니다. 이런 기능을 위하여 기름을 바릅니다. 기름을 바른 자가 히브리어로 메시아이며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막과 기구들을 기름 발라 구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장막을 세우기를 완성한 날에 12지파의 우두머리 곧 지휘관이며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립니다. 한 사람이 소 한 마리와 수레 절반입니다. 그러니 소 열두 마리와 수레 여섯 대를 공평하게 드립니다.

 

4~9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5 그것을 그들에게서 받아 레위인에게 주어 각기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쓰게 할지니라 6 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 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8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9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헌물 받은 소와 수레를 레위 인들의 회막 봉사에 알맞게 나누어 사용하게 합니다.

 

10~17절입니다. “10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12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13그의 헌물은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14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15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16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17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헌물이었더라

 

첫째 날 예물 드리는 지파와 대표자의 이름과 그 내용물이 상세하게 기록이 됩니다. 첫째 날은 유다지파의 나손입니다. 드리는 예물은 12지파가 12일 동안 똑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이라면 둘째 날부터 열두째 날까지 각 지파의 두령이 같은 헌물을 드렸다고 하면 됩니다. 졸업장을 줄 때에 대표자만 이름과 내용을 읽고 그 다음에는 이름만 부르고 이하동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열두지파의 이름과 그 예물의 내용이 꼭 같은데 반복하여 기록하였을까요? 유대인들은 모여서 성경을 공개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때로는 몇 시간씩 읽습니다. 그럴 때에도 똑 같은 내용을 열두 번 반복하여 읽어야 합니다.

 

18~83절입니다. “봉독 계속하여 열두 지파의 두령이 드린 합계목록인 84~88절도 함께 봅니다. “84 이는 곧 제단에 기름 바르던 날에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드린 바 제단의 봉헌물이라 은 쟁반이 열둘이요 은 바리가 열둘이요 금 그릇이 열둘이니 85 은 쟁반은 각각 백삼십 세겔 무게요 은 바리는 각각 칠십 세겔 무게라 성소의 세겔로 모든 기구의 은이 모두 이천사백 세겔이요 86 또 향을 채운 금 그릇이 열둘이니 성소의 세겔로 각각 열 세겔 무게라 그 그릇의 금이 모두 백이십 세겔이요 87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숫양이 열두 마리요 일 년 된 어린 숫양이 열두 마리요 그 소제물이며 속죄 제물로 숫염소가 열두 마리이며 88 화목제물로 수소가 스물네 마리요 숫양이 육십 마리요 숫염소가 육십 마리요 일 년 된 어린 숫양이 육십 마리라 이는 제단에 기름 바른 후에 드린바 제단의 봉헌물이었더라

 

제가 다 읽었습니다. 이하동문이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같은 헌물의 내용들을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한 것입니까? 본문의 현장으로 가봅시다. 지금 여호와의 성막을 준공하고 그 앞에서 헌물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을 따라 출애굽 시키시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 성막이 완성되어 그 하나님께 속한 열두 지파의 대표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들의 순서를 하나씩 언급하는데 똑 같은 내용을 열두 번 언급한다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의 헌물을 받아주심은 하나님의 용납하심이기에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드린 자들이나 끝에 드리는 자들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본문 89절을 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2)증거궤 위 3)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장막을 여기서는 회막이라고 합니다. 이런 장막과 회막을 만들게 하시고 기름을 부어 구별하게 하시고 각 지파가 이 회막의 일에 다 같이 참여하게 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말씀을 드리는 곳이나 말씀을 듣는 곳이 증거 궤 위 속죄소입니다. 증거 궤는 증거의 돌 판을 담았다고 해서 증거 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증거의 돌 판이 법이기에 법궤라고도 합니다. 그 증거 궤를 덮는 뚜껑이 속죄소입니다. 루터는 시은좌로 번역하여 은혜가 수여되는 자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속죄소 위에서 만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속죄 안에서 만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며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구약에서 보여줍니다.

 

출애굽기29:42~46절입니다.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회막의 기능에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오늘 민수기 7장에서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하는 내용은 열두 지파가 동일한 헌물을 드린 겁니다. 세상살이가 힘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쟁으로 인하여 힘이 듭니다. 내가 남보다 더 나아야겠다는 마음들로 인하여 본인도 힘들고 가족도 힘이 듭니다. 자유를 말하면서 무한경쟁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배경이 없는 자들은 차별을 당합니다. 경제력이 없어서 차별당하고, 공부 못한다고 차별당하고, 장애인이라고 차별당합니다. 성차별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런 차별을 없애자고 차별금지법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차별금지법 조항 속에 성의 정체성도 차별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삼의 성()도 외국에서는 허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제도를 법으로 만들자고 하니 기독교 단체에서 반대를 합니다. 성경에서 금하는 내용이라도 사람들이 원하면 법을 만드는 세상입니다. 여기서 이런 문제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차별이 없다는 말씀만 드립니다.

 

출애굽기 35: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애굽기 35장은 회막을 짓기 위하여 드린 예물은 마음에 감동이 된 자들이 자원하여 드림으로 회막을 만듭니다. 이런 회막과 기구가 다 만들어졌기에 오늘 본문은 그 회막을 봉헌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 드리는 헌물들은 모든 지파의 두령이 드리는 헌물이 다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레위기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제물의 차이는 있지만 제물의 효능은 차이가 없습니다.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과 백성의 지도자가 드리는 제물과 백성이 드리는 제물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가루 한 움큼의 제물을 드려도 됩니다. 그런데 그 제물의 효능은 같습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봅니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장막의 재료가 다 지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재료로 사람들은 자신의 장막을 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름 바름으로 지상의 장막과 구별합니다. 이 장막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도 차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희생의 피가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이 성막인 이유는 피 흘림과 기름부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그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금 숟가락을 물고 나왔든지 흙 숟가락을 물고 나왔든지 죽은 자로 태어난 것이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죽은 자들끼리 차별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는 이유는 아담 안에 있는 죽음의 증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일은 이런 죽은 자의 일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옮겨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는 장막 안에 들어온 자들이 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압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자들은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덧입는 것을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무너질 장막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곧 무너질 장막임을 모르고 다른 자들과 차별성을 두려고 온갖 세상의 것으로 덧칠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보증을 한 자들은 무너질 장막이 아니라 무너지지 아니할 장막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이어지는 6~10, 21절을 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각각 선악 간에 그 행한 대로 받는다고 하니 이런 말씀으로 천국에서 상급의 차이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말씀은 인간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자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거나 악을 행한다는 것을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11절 이하를 계속 보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은 자들을 말씀하면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옛 가치관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롭게 되고 나서 또 차별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된 이후의 일들 역시 성령의 은사로 이루어지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은혜만 증거 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3:10~11절입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게 됩니다. 땅의 것들은 탐심으로 인하여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은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유란 전부이며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면 모든 것이 있지만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몸은 서로 돌보는 관계이지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나서 그 헌물을 똑 같이 드림의 의미를 이렇게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 하나 됨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몸으로 사는 한 차별의 모습이 나올 겁니다. 예수님의 피보다 혈육이 먼저이고, 복음보다 취향이 먼저인 일들이 나올 겁니다. 진리보다 자기주장이 나올 겁니다. 복음을 나눈다는 곳에서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원할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주님은 이런 것들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렇게 무너질 때에 차별 없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