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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12~18 승계(承繼) 2015. 12. 27

2015년 마지막 주일 오후입니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마지막이라고 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일들도 승계를 하는 것입니다. 승계(承繼)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권리나 의무를 이어 받는 것을 말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도, 찬양대도, 식사봉사도, 청소도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말에 조직을 하다보면 한 사람이 빠지고 한 사람을 넣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조직이기에 하나를 움직이면 다 조정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지역과 남편이 청소를 함께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장 적절하게 조정을 하지만 여러분들은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조율(調律)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조율에 실수나 실패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을 때에 아담이 따 먹을 것을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몰랐는데 아담이 따 먹음으로 부랴부랴 대속을 결정하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늘 불평과 원만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과 세상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직분을 엘리사가 승계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직분이나 능력의 승계에 있어서 자꾸만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늘 사람에게 흔들리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직분이 엘리사에게 승계되는 과정을 지난주에 이어서 봅니다. 지난주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 더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 단지 능력이 배나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간 그 고난을 길을 가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마태복음 20:21~28절입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엘리야가 성령의 역사를 갑절이나 구하는 엘리사에 한 말이 예수님의 이 말과 겹쳐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내가 주는 잔을 마시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신다면 마시겠지만 그러나 내 좌우에 앉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질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의 결론을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십자가의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이 길이 엘리야는 어려운 길임을 알기에 엘리사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겠습니까? 자신이 능력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는 그런 성령의 은사를 구하신다면 이것은 다른 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표적과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승천을 통하여 엘리사에게 전달되는 능력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길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그 성령도 예수님이 가신 그 죽음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섬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함께 모인 곳에는 그 섬김의 능력으로 인하여 서로 섬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이러한 천국을 우리의 모임에서 부분적이나마 맛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에 영원하고 완전한 섬김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14절입니다.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으로 데리고 가시자 엘리야가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고 부르짖습니다. 엘리사가 왜 엘리야를 내 아버지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 부릅니까? 사실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됩니다. 나중에 엘리사가 죽을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말하는 내용이 이러합니다.

 

열왕기하 13:14절입니다.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엘리사가 죽을 때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엘리야가 엘리사가 이스라엘에 있음으로 인하여 적들이 어떻게 쳐들어오는지를 미리 알고 방비한 것도 있고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사로잡게 한 일도 있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만 보이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의 보이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2~14절을 봅니다. 엘리사도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감을 보고 나의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부르지만 이제 엘리사의 눈앞에서 엘리야는 사라지고 그의 겉옷만 남겨졌습니다. 자기의 겉옷을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요단강에 섰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승천하여 버린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서 이제 다시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요단강 앞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면서 그 겉옷으로 요단강 물을 치니 요단강이 갈라져서 건너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건넌 모습 그대로 건넌 것입니다. 드디어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와 함께 하시는 표가 됩니다. 이것이 승계이지만 이것은 엘리야의 능력도 엘리사의 능력도 아닌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의 일입니다.

 

15절입니다.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여리고의 선지자의 제자들이 요단강을 건너오는 엘리사를 보고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고 하면서 그에게 나가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기에 하나님의 능력에 엎드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만 이들은 사람 엘리사에게 엎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바울을 보면 자기 앞에 엎드리는 자를 만류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키자 사람들이 주목하여 봅니다. 이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걷게 하였다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할 때에 나도 사람이라고 하면서 만류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자 그 동네 사람들이 신이 현현하였다고 하면서 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에 바울은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면 우리도 당신들과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정말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승계하여 전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자기 부인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표적과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제가 처음 늘푸른 교회에 부임하여 왔을 때에 여전도회 사업에 목사와 사모 생일 챙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도회가 전도를 하지 무슨 목사 사모 생일을 사업계획에 넣었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에게 어떤 표적과 능력이 나타나고 대형교회가 되면 사람들이 스스로 그 앞에 엎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에게 엎드리는 사람들의 속마음은 무엇일까요? 엘리사의 생도들이 엘리사의 표적을 보고 엎드렸지만 그들 속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찾아 나서겠다고 한 것입니다.

 

16~18절을 봅니다. “16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17 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18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오십 명의 용감한 사람이 있으니 이들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이들이 말하기를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어느 골짜기에 던졌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엘리사가 보내지 말라고 하여도 그들은 엘리사가 부끄러워할 정도로 강청을 합니다. 그래서 보냈더니 사흘을 찾아보다가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엘리사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모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24:1~5절입니다.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표적과 기적 앞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임금 삼으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니 아무도 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하는 여인들도 이른 새벽에 무덤에 향유를 가져와서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왔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표적과 기적에서 찾습니까? 능력을 행한다는 주의 종들에게서 찾습니까? 자신의 체험이나 오랜 전통에서 찾습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에게 찾습니까? 바울사도가 두려워 떨었던 이유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말과 지혜에 기초할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의 복음이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 증거 되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전하였다고 합니다. 성령의 나타남이란 우리의 믿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