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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4:38~44 처음 만든 보리떡     2016. 2. 21

 

오늘 본문은 두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하나는 국을 끓였는데 독이 들어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가루를 넣으라고 해서 가루를 넣으니 그 독이 없어졌습니다. 또 하나는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의 사람이 먹고 남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우리가 어떻게 읽고 해석을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17:2~3절입니다.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성경으로 강론하는데 이때의 성경이란 구약입니다. 구약 성경을 강론합니다. 강론(講論)이란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 하는 것이 강론입니다. 이러한 강론을 하면 반드시 두 무리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믿는 자들이 나오며 하나는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이곳을 피하여 베뢰아로 갑니다.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자 베뢰아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17:11~12절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상고하였다는 것은 바울이 성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과연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 하는지 상고하여 본 것입니다. 그러자 믿는 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저도 이 방식대로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말로 성경이 그러한가 하고 상고를 하셔야합니다. 우리 목사가 그렇다고 하더라는 식으로 평생을 보내셨다면 이제는 과연 성경이 그러한지 상고(詳考) 곧 자세하게 살피고 따져보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38~41절을 봅니다. “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 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 이에 퍼 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 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갑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기간은 36개월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시대는 흉년이 7년입니다(왕하8:1).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갑절이나 달라고 하였는데 흉년도 갑절이나 왔습니다. 이런 흉년에 엘리사가 길갈에 오자 선지생도들 백 명이 엘리사 앞에 앉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에게 큰 솥을 걸고 국을 끓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밥이 주식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국은 걸쭉한 죽처럼 먹는 주식을 말합니다. 흉년에 먹을 것은 없고 들에 나가서 야생 열매를 가져다 국을 끓입니다. 이제 죽이 되어 나누어 먹게 하는데 그 솥에 죽음의 독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흉년에 가뭄으로 야생 열매가 더욱 써졌다고 봅니다. 오이 꼭지가 쓴데 가뭄에는 더욱 씁니다. 그런 열매를 끓여서 졸이면 더욱 써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오라고 해서 가루를 솥에 넣으니 독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선 엘리사가 가루를 솥에 넣으라는 것은 엘리사 자신의 경험으로 한 것일까요? 어떤 주석에 보니 엘리사가 이런 들 생활의 경험이 있어서 해독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에 애굽 궁중의 교육과 광야 40년의 경험이 사용되었을까요? 사용되지 않았을까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애굽 궁중 교육의 결과는 자기 동족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살인을 하여 도망을 갔습니다. 광야 40년은 광야의 지리와 광야 생활을 잘 알기에 그렇게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가니 오히려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의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벧전1: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44절에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 이 단락에 없다고 해서 엘리사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흉년이 들었으며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 두 사건을 함께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엘리사가 한 것이지 자신의 지혜와 광야생활을 경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가루는 무엇입니까? 곡식가루입니다. 이 단어는 밀가루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다음 내용에 나오는 떡은 보리떡입니다. 보리 가루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밀가루나 보리 가루나 간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곡식 가루나 떡을 가져온 것은 처음 익은 열매로 봐야 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들은 처음 익은 곡식을 바알의 제단에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민수기 15:20~21절입니다. “20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2)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 21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2)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이러한 처음 익은 곡물이나 과일들은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18:13).

 

본문 42~44절입니다. “42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두 가지 표적 중에 앞의 것은 독이 가득한 열매로 끓인 솥에 가루를 넣음으로 해독이 되었습니다. 뒤의 표적은 어떤 한 사람이 살리사에서 왔는데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 것이라는 말은 처음 익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제사장에게 들고 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남겨진 백성이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의 전이나 바알의 제단에 들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가져왔지만 그 양이 너무 작아서 백 명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여기서 보리떡은 아이의 도시락에 넣은 것이 아니라 좀 커서 떡 한 개로 한 명이 먹어도 백 명 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양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었더니 먹고 남았습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43절과 4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먹고 남으리라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먹고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사의 이 두 이적을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가 있겠습니까?

 

두 표적이 다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제대로 없는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언약의 저주가 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어떤 재앙이 주어지는지 신명기 28:23~24절입니다.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이 말씀대로 북 이스라엘은 흉년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에 멸망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이 땅 전체가 저주 받은 땅입니다. 이런 땅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생명을 얻을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 안에 사망의 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심고 거두어 살아가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생존을 이어간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온갖 경쟁을 다 동원하여 심고 거두어들입니다. 때로는 불법을 통하여서도 많이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의지하고 삽니다. 이것이 바로 독이 든 음식과 같습니다. 이런 해석이 알레고리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분은 이 땅의 원인이 아니라 하늘로서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심은 대로 거두어 먹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심고 거두어 먹고사는 것은 우리의 육체로부터 심고 거두는 것이기에 썩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들로 거두어들인다는 썩어질 것이라는 것이 인류역사가 자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생의 양식은 무언지 모르기에 심고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성령이 임하여야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인 됨과 전전타락과 생명에 관하여 전적으로 무능함을 알게 되기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위하여 심음으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 썩어질 것만 가득한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거두는 일에 평생을 보내는 우리의 삶에 균열이 생기고 지진이 일어나고 폭풍이 몰아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의 두 표적인 가루를 독이 든 솥에 넣음으로 독이 제거되는 것이나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의 사람이 먹고도 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살리실 처음 익은 곡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서 처음 익은 곡식이나 열매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나 처음 태어난 장자나 처음 태어난 짐승의 수컷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내용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7~51절입니다.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오며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자신이 생명의 양식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며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자도 죽었습니다. 엘리사의 기적을 통하여 떡을 먹은 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공급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11:16~18절입니다.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면 그 가루로 만든 떡덩이도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것의 희생으로 나머지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거룩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잘려나갔습니다. 그 자리에 이방인에 붙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우리는 접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처음 익은 열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자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22~23절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것을 아는 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곧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만이 압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한 성도도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모든 일들이 썩어질 것을 심고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썩어짐에서 해방되는 그 날을 소망하며 살게 됩니다. 이 소망은 보이지 않기에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이어지는 24~30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솥의 독이 없어지고 처음 익은 보리떡 20개로 백 명이 넘게 먹고 남게 되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익은 곡식이나 열매나 처음 태어난 사람이나 짐승이나 첫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는 것이며 그 맏아들 곧 장자의 희생으로 다른 형제들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일어나는 자는 미리 정하여진 자들입니다. 창세전에 미리 정하여 진 자들을 복음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까지 하신 것은 모든 것이 다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임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9~21절입니다.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더 확실한 예언은 기록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서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이것을 주의하라는 말씀은 기록된 이 성경으로 예수님이 보일 때 까지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는 사람이라면 온 세상도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을 알기에 세상사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마땅하다고 여기며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