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1~16:43 다윗과 언약궤 2017. 4. 16

 

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다윗이 모든 지휘관들과 의논하고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모든 제사장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고 합니다.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제 사울이 죽었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전체 왕이 되었으니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메고 오자고 하는 말을 백성들에게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 일을 좋게 여기고 그대로 행하겠다고 합니다. 왕과 모든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올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5~10절입니다. “5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9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언약궤는 제사장들이 어깨로 매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사사시대에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에는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일으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염병의 원인이 언약궤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 그것도 멍에를 매지 않은 암소에 수레를 끌게 하여 언약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암수 두 마리가 울면서 바르게 벧세메스로 가는 것을 보고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로 인하여 전염병이 온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는 법을 알 것인데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15:13절입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언약궤를 모셔가는 의도는 사울 때에는 언약궤 앞에서 묻지를 않았습니다.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도 10:14절을 보면 여호와께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메어오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묻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를 모셔 와서 여호와께 묻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과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다 좋아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셔야 되는 것입니까? 다윗은 처음 실패로 인하여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우리가 규례대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다만 절차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을 먼저 구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언약궤를 메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11~14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12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왕과 지휘관들과 백성들이 좋아해서 언약궤를 모셔가려고 한다고 언약궤가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가 뛰자 웃사가 언약궤를 잡았습니다.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게 보호한 것입니다. 잘한 일로 보아야하는데 왜 웃사를 죽이는 것입니까? 웃사를 죽이신 이유는 언약궤가 부수어지더라도 다윗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윗의 마음에 언약궤를 모셔감으로 인하여 자신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음을 공고히 하려는 속마음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참으로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웃사를 죽이는 하나님을 보고 다윗이 화를 낸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궤를 잘 모시려고 하였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그 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무서워서 어디 섬길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벳에돔의 집에 맡겨버립니다. 마치 사사시대 때 블레셋에 언약궤가 빼앗겼을 때에 언약궤가 가는 곳 마다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러니 블레셋 성읍의 사람들이 언약궤를 마치 폭탄 돌리듯이 서로 피하려고 한 모습처럼 언약궤를 오벳에돔의 집에 메어가게 하였습니다.

 

13절을 보면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입니다. 가드 사람이라면 블레셋 사람입니다. 가드 사람이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살고 있습니다. 전쟁 포로로 잡혀왔는지, 아니면 사사시대에 언약궤의 능력을 보고 왔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또는 기브온 족속의 후예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언약궤를 가드 사람의 집으로 메어가게 한 것은 웃사처럼 죽어도 괜찮은 놈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서로 피하려고 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오벧에돔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웃사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을 겁니다. 대단한 왕의 행사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벧에돔은 이제 나는 죽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안겨지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다시 그 언약궤를 메어가려고 여호와께 물어서 규례대로 메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가려고 한 처음 마음이 어떤지가 드러났습니다.

 

기서 오벧에돔에 대하여 좀 더 봐야 합니다. 15:18절과 24절을 보면 오벧에돔이 레위지파의 명단 속에 문지기로 나옵니다. 오벧에돔이 가드 사람이라는 것을 앞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이 왜 레위지파에 소속이 되어 언약궤를 지키는 문지기가 된 것입니까?

 

여호수아 9:2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사람들은 연합하여 여호수아군대를 대적합니다. 그런데 기브온 족속은 배신하여 여호수아에게 화친을 청합니다. 아주 먼데서 온 것처럼 위장하고 화친을 청하자 여호수아가 허락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까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을 했으니 언약을 파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되 어떤 조건을 주는가 하면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영영히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어지는 24~27절입니다. “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25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오벧에돔이 기브온 족속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만 가드 사람인데 레위지파의 명단에 소속이 되어 여호와의 언약궤를 지키는 문지기 이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진멸당하여 마땅한 자들 중에서 이런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기브온 족속이 저주를 받아 여호와의 집에서 나무패며 물 긷는 종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이냐는 말입니다. 오벧에돔도 그러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언약궤를 받을 때에는 죽을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그 언약궤로 인하여 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십자가를 설명하는 일에 얼마나 적절한 내용입니까! 십자가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21:23, 3:13). 그 저주 받은 십자가를 환영하여 받아들일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족속처럼 오벧에돔처럼 여호와의 집과 언약궤를 위하여 종노릇하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벧에돔처럼 언약궤를 받아들이게 된 자들이 아니라 다윗처럼 언약궤를 자신이 호위하여 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무엘상 6: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모았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은 정병 삼만 명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보면 best soldiers입니다. 정예병사 삼만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모양새는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 모습입니까? 다윗이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15:24~26절입니다.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피난 가는 중입니다. 이때 사독과 함께 한 모든 레위사람들도 언약궤를 메어다가 모든 백성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언약궤가 다윗을 따라가면 백성들이 마음을 압살롬이 일시동안 도적질 하였다고 할지라도 곧 다윗에게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도로 메고 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보내라는 말을 하지만 다윗이 여기서 중요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 앞에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여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실 것이라고 합니다. 전에 다윗이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려고 하다가 혼이 났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언약궤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려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어마어마한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지만 은혜를 입은 다윗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뿐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드리려고 하였고 성전을 위하여 많이 준비하였기에 복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호하려고 하고 자신의 정병 삼만 명으로 호위하여 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115:1).

 

그러므로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안치하는 내용을 사무엘상은 아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무려 4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약궤를 중심으로 다루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김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돌아오게 된 것은 자신들이 언약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내용을 이루어주셨다는 것을 이해하였기에 이렇게 언약궤가 중요하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13장은 처음 언약궤를 메고 오려다가 실패한 내용입니다. 14장과 15장은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친 내용과 다윗이 궁전을 만들고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여 장막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어 오도록 아론 자손과 레위사람들을 모읍니다. 또한 레위인 찬양대를 조직하여 언약궤를 메고 옵니다. 드디어 언약궤를 메고 오는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역대상 15:25~29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언약궤를 멘 레위인을 도우셨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과 레위인들과 모든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고 기뻐서 찬양을 합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메고 간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우리와 함께 하여주신다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심을 기뻐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을 미갈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윗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됩니다(삼하6:16). 왕비가 왕의 씨를 생산하지 못하면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되는지 우리는 조선왕조의 드라마를 많이 봐서 잘 알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사울이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줍니다(삼상25:44). 그런데 미갈과 발디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고 요세푸스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는 것이 저주가 됩니다. 그러면 미갈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언약궤 그게 뭐라고 언약궤를 메어 오면서 왕이 체신 머리 없이 계집종들 앞에서 춤을 추어서 속옷이 다 보이냐는 비난이었습니다. 이런 미갈은 무엇을 모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하여 주시는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오벧에돔처럼 난데없이 십자가가 덮쳐온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십자가 싫다고 던져버린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미갈처럼 살아가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덜컥 덮쳐온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저주 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십자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기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안치하고서 다윗이 찬양하는 내용이 역대상 16장입니다. 역대상 16장은 시편 105편과 96편과 106편을 편집하여 하나의 찬송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셨다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이 모셔 와서 안치하였다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 앞에서 웃사처럼 찢겨져야 마땅한 죄인에게 함께 하여 주시는 그 놀라운 긍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궤 뚜껑의 이름이 속죄소입니다. 언약궤가 함께 하였다는 것은 이런 속죄, 긍휼을 받았기에 이 축복을 전하기 위하여 집으로 갑니다. 우리도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그 다윗의 복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도 이 복을 전하러 집으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