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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1~4 나봇의 포도원 2015. 11. 8

 

지난주에 본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붙여주신 적을 진멸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살려줍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아합왕에게 하나님은 왜 적을 붙여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스라엘에게도 알리시고 적들에게도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붙여주셨기에 전쟁에 패배한 아람의 왕이 그들의 참모의 말을 듣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고 골짜기의 신이 아니라고 하였기에 두 번째 공격에도 완전히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런 전쟁에서 적을 살려줄 때에 아합이 책망을 받습니다.

 

왕상 20:42~43절입니다. “42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43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선지자의 책망을 받은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이런 모습이 오늘 본문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4절을 보시면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안합니다. 왜 이렇게 근심하고 답답합니까? 아람의 왕을 살려줌으로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아합이 근심하며 답답하게 왕궁으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스르엘로 돌아왔습니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이스르엘은 별장과 같은 곳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르엘 왕궁 근처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습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좋은 조건으로 값을 쳐줄 테니 자기에게 그 포도원을 팔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상으로 물려받은 땅을 팔 수가 없는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니 왕도 어쩔 수 없어서 근심하고 답답하여 밥도 안 먹고 침상에 돌아 누워있습니다. 나봇이 왕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충성한 것입니다.

 

레위기 25:23~28절입니다.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러한 토지제도는 절대빈곤층을 막는 가장 좋은 제도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으로 땅을 무상으로 차지하였습니다. 이 땅은 각 지파별로 분배받은 땅이기에 사고팔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살다가 어려우면 경작권만 팔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나아지거나 아니면 친척이 땅을 물려주면 됩니다. 룻기서에서 땅을 기업으로 물려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기업을 물려줄 뿐 아니라 룻과 결혼하여 그 대를 이어줍니다. 이것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기업 물려주는 자, 원수 갚아 주는 자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친척도 없으면 희년이 되면 자동으로 원래 주인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제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사야 5:8절입니다. “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 안 되는 부동산 투기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묘하게 희년을 법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변칙들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나봇의 거절을 듣고 유약한 왕이라서 근심하고 답답하여 아이처럼 삐져서 침상에 돌아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이미 다른 나라의 공주로 자라왔기에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 땅을 빼앗아 자기 남편에게 돌립니다.

 

이러한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 대하여 김진홍 목사의 글을 인용합니다. 저의 메일로 매일 오는 편지가 있습니다. 김진홍목사와 판화가 이철수씨입니다. 김진홍 목사의 메일 중에 6회에 걸쳐 토지문제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삭제하지 않고 저장해 둔 내용이 있습니다. 상당히 길지만 나봇의 포도원 사건과 연결되는 내용이라서 읽어드리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00나라가 넘는 신생국들이 시작되었다. 그들 중에서 선진국을 눈앞에 둔 나라는 불과 두서너 나라 밖에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싱가포르, 한국 정도이다. 이들 중에 한국의 발전이 세계사적으로도 기적에 가까울 만큼 성공적인 사례이다. 한국이 온갖 시련을 거치며 오늘의 번영에 이르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자신들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법 2가지를 실천하였기 때문이라 지적한 분이 있다. 강원도 예수원을 세우신 토레이 신부다. 한국 이름으로 대천덕 신부로 불리는 토레이 신부는 영력과 통찰력이 뛰어나셨던 분으로 몇 해 전에 하늘나라로 옮기셨다.

 

첫째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성경의 법을 남한 사람들이 실천하였다.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명기 2612)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을 말할 때에 대표적으로 손꼽는다. 십일조 헌금으로 그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로 함께 배부르게 하는 밥상공동체를 이루라 하였다. 남한이 언제 이 법을 실천하였던가?

 

해방 이후 6·25 전란을 거치는 동안에 북한에서 내려온 천만에 가까운 피난민 나그네들을 남한에서 받아들여 함께 살았던 것을 일컫는다. 물론 북한 피난민들을 잘 대우하진 못하였을지라도, 이렇게 좁은 땅에서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임에도 많은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간 역사가 전 세계사에서도 드문 사례라 한다. 그래서 남한이 복을 받아 이렇게 잘 살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는 남한이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0420일까지 완성한 토지개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성경은 토지가 여호와의 것이기에 지주가 큰 땅을 차지하거나 토지를 매매나 투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을 금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무엇이든지 만든 분이 주인이다. 그러면 토지는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러니 하나님이 토지의 주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인 토지를 사람이 사고팔고 하거나 투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지주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땅이기에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당시에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으로 팀을 짜서, 1949년에 전국의 농지를 지주들로부터 소작인들에게 넘겨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1950420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완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토지를 받게 된 소작인들이 공산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웠기에 6·25 전쟁에서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미국이 월남전에 참여하여 한동안 전쟁을 지속하여 나가던 중에 월남전의 배후에 흐르는 특이한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월남의 토지경제문제가 얽힌 복잡한 구도를 알게 되었다. 월남은 오랜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의 종교는 캐토릭이다. 월남인들 중에는 식민종주국인 프랑스의 종교인 캐토릭을 받아들여, 캐토릭 신도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편에 서서 여러 이권에 관여하여 치부하게 되고, 넓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캐토릭 지주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 캐토릭 지주들의 농지에 소작인들은 불교도들이었다. 그런 상태로 세월이 흐르자 캐토릭 지주세력과 불교소작인들 간의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사이에 공사주의 사상을 지닌 베트콩들이 파고들었다. 베트콩 전사들은 밤마다 농촌마을을 다니며 불교소작인들을 선동하고 교육하였다. < 토지는 농민에게... >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캐토릭 지주들을 몰아내고, 소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되니 불교소작인들이 베트콩 편에서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로는 자유 월남군과 미국군, 한국군이 낮 동안에 베트콩을 물리쳐 놓아도, 밤사이에 다시 베트콩 세력이 침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고민하던 미국 CIA는 그 해결책을 한국에서 찾았다. 한국이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토지분배정책을 실시하여, 그 효과로 625 전쟁에서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던 경험을 월남에서도 적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월남 정부에 요청하였다. 토지 문제를 한국처럼 풀어서 전쟁에 이기도록 하자고 건의 하였다. 그러나 월남정부와 캐토릭 지주세력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 ‘그런 주장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세력이 누구냐?’

 

그것이 바로 빨갱이들이 주장하는 소리다. 미국이 왜 빨갱이들의 선동에 놀아나려느냐?”며 거부하였다. 결국은 월남의 캐토릭 지주들은 땅 문서를 손에 쥔 채로 베트콩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런데 <토지는 농민들에게, 소작인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이다. 어제 글에서 적은 바와 같이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농민들은 하나님의 소유인 토지에서 농사짓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구도 토지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모든 토지는 마땅히 하나님의 법에 따라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일러 주는 토지경제의 근본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지고, 공산주의 경제는 노동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다. 그런데 성경의 경제는 토지를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다. 한 탁월한 경제학자의 말이 있다. 지금 세계는 자본주의도 병들어 있고, 공산주의도 숨이 끊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대안(代案, Alternative)은 무엇인가. 바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성경의 토지경제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경제를 재개편하는 길이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23)

 

마호메트가 일으킨 이슬람 혁명은 농민혁명이었다. 크리스천 지주들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하고만 있던 소작인들에게 마호메트가 저항의 깃발을 들면서, 레위기 2523절의 <토지는 알라의 것이다>는 구절을 구호로 내세우고 지주들의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알라신의 뜻이라고 외쳤다. 7세기에 이르러 중동지방은 기독교 지역이었다. 이집트, 사우디, 이란, 이라크, 터키 모두가 기독교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부자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토지에 관한 법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소유한 농토에서 소작하는 소작인들에게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다. 소작인들이 일 년 내내 수고하여 농사를 지어 놓으면 추수기에 나타나 70%에 가까운 몫을 챙겨 갔다.

 

그 수입으로 그들은 로마시로 가서 노예를 부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농토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은 지주가 남긴 수확의 30%에 의지하여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한 소작인들의 탄식과 원망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이런 때에 마호메트가 나타나 깃발을 들었다. <토지는 알라신의 것이다>는 레위기 2523절의 말씀을 내세운 깃발이었다. 지주들을 몰아내고 알라가 사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소작인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와도 같은 위력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마호메트의 농민혁명은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삽시간에 중동 땅 전체를 석권케 되었다. 절대 다수였던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혁명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농민혁명은 그냥토지경제의 혁명이 아니었다. 새로운 종교운동을 내세우는 종교혁명이었다.

 

성경은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니 누구도 지주가 되어 주인행세를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농민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부자 크리스천들은 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는 그 토지를 소작인들이 경작케 하여 과도한 몫을 챙기기만 하였다. 겉으로는 크리스천들이었지만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었다. 그 시대의 부자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토지에 대하여 가르치는 교훈을 외면하였다. 그래서 낙타 때를 몰고 사막을 다니며 대상으로 살던 마호메트가 알라 신의 대변자로 등장하여 부자 크리스천들을 몰아내고 알라 신이 사랑하는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넘겨주자는 구호가 먹혀들 수밖에 없었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은 바알신앙과 피나는 투쟁을 하였다. 예언자들의 신앙과 바알신앙의 차이는 토지제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점령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였다. 각 지파들은 배정 받은 땅을 지파 내의 가족 숫자대로 구분한 후 제비뽑기로 각 가정의 토지를 확정하였다. 그들은 제비뽑기 할 때에 하나님의 영이 간섭하시어 각 가정에 가장 합당한 토지를 배분되게 하신다고 믿었다. 그렇게 제비뽑기로 자기 가정의 몫으로 배정된 토지를 기업(基業)이라 하였다. 이때의 기업은 중소기업, 대기업 할 때의 기업이 아니라 터기 기() 자를 써서 생업의 기초가 되는 기업이다. 비록 자기 가정에 좋지 않은 땅이 기업으로 배정 되었을 경우에도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경이 일러 주는 토지법대로 그렇게 배정된 토지를 사고팔고 하거나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다. 왜냐하면 토지의 소유주는 여호와시오, 농민들은 그 땅의 경작자로서 배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인인 땅을 매매하거나 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처사로 여겼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이 법을 어겨 농민의 토지를 살 수 없는 법이었다. 이런 토지제도는 평등경제를 실현하는 기본이었다.

 

그러나 바알종교에서는 토지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달랐다. 바알체제에서는 왕이 바알 제사장 역할까지 담당하여 모든 재산,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었다. 그리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토지와 집을 사들일 수 있었다. 이런 체제 아래서는 빈부격차가 급속히 벌어져 부자들은 있는 재산으로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백성들은 날로 더 가난하여지는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래서 바알신앙 아래서는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이 날로 심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집요하게 바알 종교와 다툰 것은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가난한 백성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 있고 재산 있는 사람들은 바알종교로 기울어 졌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예언자들과 힘없는 백성들은 여호와의 법을 지키려 하였다. 그래서 여호와 신앙과 바알신앙 사이에 길고 긴 투쟁이 이어진 것이다.

 

이런 투쟁을 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이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이스라엘 왕이면서 처갓집의 종교인 바알신앙을 맹종하였던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여호와께서 정하신 토지규례를 어기고, 나봇의 포도원을 부당하게 차지하였다가 자신의 왕위마저 잃게 되는 비극을 연출케 된다. < 나봇의 포도원 사건 >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열왕기상 211)

 

나봇이란 이름의 농사꾼에게 포도원이 있었다. 그의 유일한 죄는 그의 포도원이 아합 왕의 왕궁에 가까이 있었던 죄 밖에 없었다. 아합 왕의 왕궁에 식구가 늘어나자 채소밭이 모자라져 왕궁을 넓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에 왕은 농사꾼 나봇에게 제안하였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열왕기상 212) 일견 이 제안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듯이 보인다. 나봇의 포도원을 왕실에서 쓰는 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아니면 돈으로 지불하겠다는 제안에 아무런 그릇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단 한 가지 이유인즉 하나님이 정하신 토지법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조산의 유산인 토지를 왕에게든 누구에게든 넘긴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신다는 이유였다.

 

농사꾼의 거절에 화가 치민 아합 왕은 속이 상하여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런 모습을 본 왕후 이세벨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셨다. 이세벨 왕후는 바알 제사장이자 왕인 엣바알 왕의 공주였다. 군사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가 자신의 취약한 국내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웃 나라 와 정략결혼으로 결혼시킨 왕후였다. 왕후에게는 농민에게 거절당하여 상심하는 남편의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모든 토지의 주인인 친정아버지만 보아오던 그녀에게 농민의 땅을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이 이해될 수 없었다. 이에 이세벨은 남편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음모를 구며 나봇을 죽게 하고 땅을 빼앗아 남편에게 주었다.

 

이스라엘에서는 두 사람의 증인만 있어서 누구누구가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증언만 있으면 그를 죽일 수 있는 법이 있었다. 법이라기보다 전통에 가까운 관습이었다. 왕후는 가짜 증인 둘을 세우고는 나봇을 인민재판식으로 재판에 내세워 죽여서는 나봇 자신의 포도밭에 시체를 버렸다. 그리고는 포도밭을 가로챘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무사히 통할 리가 없었다. 예언자 엘리야에의 귀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디셉 사람 엘리야이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찾아가 앞으로 될 일을 다음같이 선포하였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열왕기상 2119) 훗날 에후 장군이 이끄는 군사정변이 일어나 아합 왕과 이세벨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나봇의 시체를 던졌던 포도밭에 던져졌다. 토지에 대한 여호와의 법이 이렇게 엄격하게 지켜졌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레위기 2523, 24)

 

무엇이든지 만든 사람이 주인이다. 토지는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래서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토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은 하나님이 지주인 토지를 맡아 경작하는 경작자들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토지를 매매의 대상으로 삼거나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그런데 농민이 갑작스레 환자가 생기거나 위급한 일에 돈이 필요할 경우에 토지를 팔지는 못하지만 경작권을 양도할 수는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경작권을 양도하였다가 돈이 생기면 언제든지 경작권을 되찾아올 수 있게 하였다.

 

이를 레위기 2524절에서는 <토지 무르기>라 하였다. 토지 무르기는 원래의 경작자가 언제든지 넘겼던 경작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규정이다. 토지 무르기를 영어로는 Redeem이라 하고 그 명사형을 Redemption이라 하다. 그런데 구약에서 토지 무르기가 Redemption인데 신약에서는 속죄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Redemption이다. 에베소서 17절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Redemption)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구약에서 토지를 되찾아 오는 법이 신약에서는 값을 치르고 죄 씻음 받는 법으로 승화 되었다. 구약에서는 경작권을 넘긴 땅에 대하여 땅 값을 치르고 땅을 되찾아 오는 토지 무르기이고, 신약에서는 죄 아래 있는 우리들을 예수께서 피 값을 치르고 구원하는 속량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을 기본으로 하고 공산주의 경제는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성경의 경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다. 지금 세계는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있다. 자본주의는 병들어 신음하고 있고, 공산주의는 아예 지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어느 경제학자가 이르기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代案, Alternative)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하였다.]

 

상당한 분량의 내용입니다만 여기에 대하여 일부 오류가 있어서 제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이 없습니다. 너무 바쁘신 분이라 답변을 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보낸 메일 내용은 남한의 토지개혁이 철저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토지관리회사: 동양척식회사(일제시기, 1908년 설립)-->신한공사(1946221일 미군정 법령 제52호로 설립됨)-->중앙토지행정처(19483) 농지개혁 1949년 제정 1950년부터 시행 토지개혁문제는 남한의 경우 미군정하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승만정권에게 넘겨졌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초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의한 전면적 토지개혁이 이루어졌으나, 남한에서는 단독정부 수립 후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503월에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실시되었다.)

 

45년 말의 소작지 면적은 144만여 정보였으나, 5년 만에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분배된 토지는 약 55만 정보, 즉 해방당시 소작지의 38%만이 분배되고 72%는 이미 사적으로 매각되었던 것이다. 농지개혁의 본래 목적은 자작농 양성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분배농지에 대한 세금과 상환액이 과중하여 분배받은 농지를 되파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농지의 농민적 소유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다시 토지 겸병과 소작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농지개혁은 보상의 부실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대지주를 제외한 중소지주를 몰락시키고 매판 자본가를 양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가구당 경지규모를 더욱 영세화시킨 불철저한 개혁이 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농지개혁 [農地改革]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

 

북한에서는 1946131일 농민연맹이 결성되고, 그 해 33일 대표회의를 열어 토지개혁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시대 확립한 토지등기제도를 폐지하고 일제시대 발급한 토지대장을 모두 회수할 것, 둘째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고용노동자, 토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무상 분배할 것, 셋째 농민의 지주에 대한 부채 취소, 넷째 관개기설·산림 등을 몰수하여 국유화할 것 등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틀 뒤인 35일 이 요구를 받아들여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으며, 토지개혁 수행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한 형사법으로 토지개혁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부동산·농기구 등의 매매·처분 등을 금지시켰다. 이어 37일에는 토지개혁 법령의 구체적 실시규정으로 북조선 토지개혁 법령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38일에 토지개혁에 관한 세칙이 공포되고, 3월 말까지 짧은 시간에 정부 매수가 완료되었다. 이어 토지의 농민에 대한 분배는 도 인민위원회가 토지소유권에 관한 증명서를 교부하여 이를 토지대장에 등록함으로써 완료하는 절차를 밟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지개혁 [土地改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냈습니다만 남한의 불철저한 토지개혁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토지개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하여 철저하게 개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정치적인 전술과 전략이었습니다. 말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라고 하였지만 현물세 등의 징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대 전제는 모든 생산수단을 공유화하여 개인이 사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모든 토지는 국가가 대지주가 되고 모든 농민들이 소작농이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토지법들을 계속 수정이 되는데 1977년 이후에 북한의 토지법이 이렇습니다. 토지는 혁명의 고귀한 전취물이며 사회주의 토지의 대전제대로 국가 및 협동단체의 소유이며 인민의 공동소유로서 누구도 팔고 사거나 개인의 소유로 만들 수 없다(한국토지공사 토지연구원장 오복룡씨의 통일 후 북한의 토지정책에 대한 논문 중 발췌).

 

이런 모습을 보면 사회주의가 얼마나 성경의 내용을 비슷하게 추구하는지 보게 됩니다. 토지가 혁명으로 얻은 땅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토지는 여호와의 전쟁으로 승리하여 무상 분배한 것입니다. 그래서 토지를 사고팔지 못하게 하는데 이들은 공산 혁명으로 토지를 획득하여 국가와 집단과 인민의 공동소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지만 실제의 권력은 공산당 하나뿐이기에 공산당 일당독재체제가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이비 종교집단화 되어 있습니다. 삼대에 걸쳐 충성을 하는 것은 얼마나 집단적인 세뇌가 되어 있으면 저렇겠습니까? 그런데 남한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42월 초순 TV조선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에 응한 한 시민은 "지금 9살인 박지만의 아들(박근혜 대통령의 조카)40년 후에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가 지금 북한과 남한을 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어떤 분이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해서 나는 하늘나라 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아무리 좋은 토지법이 있어도 그 토지를 받은 인간들의 탐심이라는 것이 그 법을 잠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은 이렇게 권력으로 토지를 빼앗아 오는 모습이 바알의 정치 경제체제인 자본주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남 유다는 바르게 살았습니까? 안식년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여 토지가 70년을 안식하게 된 내용을 수요일 저녁 다니엘서의 일흔 이레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참된 희년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희년을 이루어내심으로 정치 사회적인 혁명이나 토지개혁과 같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붙잡혀 있는 자들을 대속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의 땅 무르기를 영어로 표현한 것을 에베소서 117절과 연결시킨 것은 참 좋습니다. 그 부분을 다시 봅니다.

 

레위기 2524절에서는 <토지 무르기>라 하였다. 토지 무르기는 원래의 경작자가 언제든지 넘겼던 경작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규정이다. 토지 무르기를 영어로는 Redeem이라 하고 그 명사형을 Redemption이라 하다. 그런데 구약에서 토지 무르기가 Redemption인데 신약에서는 속죄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Redemption이다. 에베소서 17절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Redemption)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을 받았다는 것은 땅이 없어서 늘 소작농으로 있던 자들이 무상으로 땅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라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에게 탕감해 줄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말 속량을 받았습니까? 어떤 분이 부산의 안락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봐 달라고 해서 두 편 들어보았습니다. 통합 측의 상당한 규모의 교회당이었습니다. 그 중에 지난 주 수요일 설교의 제목이 유무상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여 일어난 유무상통에 대한 설교 후에 그 목사님의 기도를 인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초대교회에 있었던, 정말로 종말을 믿었던 하나님의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는 이단들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었지만 저들은 정말로 종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도 믿게 해 주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내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음을 확신케 해 주십시오! 그래서 소유에 대한 욕심을 조금씩, 조금씩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먹지 않도록,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똑 같아! 이런 말을 절대로 듣지 않도록 하나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이 소유에 대한 욕심을 싸우다, 싸우다 안 되면 저희를 죽여서 천국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이런 날을 소망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