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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2:29~40 무심코 2015. 11. 29

 

아합이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미가야의 말이 아니라 시드기야와 함께한 400여명의 선지자들 말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아합의 귀를 즐겁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멸망할 자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자가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신비주의, 어떤 사람은 금욕주의, 어떤 사람은 번영신학에 물든 자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찾아서 읽어보게 하면 눈길을 돌립니다. 말씀을 보여주고 그냥 읽으면 자신의 잘못이 그대로 보이는데도 눈길을 말씀에서 피합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미가야를 통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가야 선지자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을 들어도 아합과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하여 아람과 전쟁하려고 올라갑니다. 이미 천상회의에서 아합을 이렇게 죽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어도 아합은 자기 고집대로 올라가는 것이 멸망으로 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로마서 2:4~5절입니다.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우리가 아직 안죽고 살아있는 것은 아직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의 인자하심과 용납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며 사는 자들을 향하여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한 진노를 쌓는다고 합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해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전쟁터로 나가지만 아합은 무언가 찝찝한 것입니다.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만 그 말에 일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왕복을 입으라고 하고 자신의 왕복을 입지 않고 변장하여 전쟁터에 참여합니다. 여호사밧은 이러한 아합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혈연관계만이 아니라 국가의 힘도 북 이스라엘이 강한 때이기에 아합의 말을 거절 못하여 왕복을 입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납니다.

 

31~33절입니다. “31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33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아람 왕이 오직 이스라엘의 왕과만 싸우라고 병거의 지휘관 32명에게 명령을 합니다. 병거란 고대 전쟁에 가장 강력한 전투력입니다. 아람 왕이 왜 이렇게 아합을 잡으라고 하였을까요? 왕 하나만 잡으면 전세는 기울어지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아람 왕이 전에 아합에게 굴욕을 당한 왕이라면 복수를 위하여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람 왕의 손에 의하여 죽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어느 무명용사의 무심코 쏜 화살에 아합이 죽임을 당합니다.

 

34~35절입니다. “34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지금 성경은 무심코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전에 성경은 우연히로 되어있습니다. ‘무심코우연히라는 말이나 간에 그 사람이 활을 쏘는데 아합을 노리고 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합을 노리고 공격한 아람 왕이 보낸 32명의 병거 지휘관들도 잡지 못한 아합을 우연히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전쟁에서 우연히 화살을 쏘거나 무심코 쏘는 자들은 없습니다. 그냥 적을 향하여 쏜 것입니다. 때로는 무서워서 목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쏠 수도 있습니다. 전쟁영화를 보면 진지에서 무서워서 하늘로 총을 쏘는 자들이 있듯이 그냥 그렇게 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살이 정확하게 아합에게로 날아갑니다. 갑옷을 입었는데 그 솔기 사이로 파고들어 부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후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싸움이 맹렬하여 부상을 입은 채로 적을 막다가 병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렇게 된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전에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연히 또는 무심코 일어나는 일 조차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종속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칼뱅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합니다.

 

36절입니다. 해가 질 녘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이 말씀은 미가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22:17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가라고 하는 말이 들린 것은 아합 왕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가야의 예언만 아합에게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37~38절입니다. “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아합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를 하고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을 때에 개들이 그 피를 핥습니다. 이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가는 아합에게 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난 일입니다. 열왕기상 21:19절입니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이 말씀대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39~40절입니다. “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 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0 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아합은 온갖 우상숭배를 한 왕이지만 이스라엘은 힘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두 번이나 대승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게 하시기 위한 승리였습니다만 그는 끝끝내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전쟁에 승리를 주셨는데 그는 오히려 그 힘으로 궁들을 지었습니다. 사마리아에만 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르엘도 궁을 지었습니다. 아미 이곳에 상아로 만든 궁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로 부자였으면 상아로 궁을 만들었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다 왕의 역대 지략에 기록될 뿐입니다. 결국 그의 죽음은 개들이 그 피를 핥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이고 빼앗은 자의 결국이 이러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나의 귀를 즐겁게 하고 나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여 주는 식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십니까?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무심코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우연한 일 같은 것도 무심코 일어나는 것도 다 우리 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도구들입니다. 무엇이나 말씀으로 해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찾아볼 단어는 무심코또는 우연히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의 용례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트롱 코드 8537인데 온전함, 충실, 성실함, 완전함이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람에게서는 우연히 무심히 한 일이 하나님의 온전함과 성실함과 완전함으로 사용된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이러한 용례 한 곳을 찾아봅니다.

 

창세기 20:5~6절입니다.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아브라함이 바로 왕에게도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하여 팔아넘기더니 가나안 땅에서 아비멜렉 왕에게도 그런 짓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왕에게서도 사라를 건져주시고 아비멜렉에게서도 건져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그 여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남편 있는 여자라고 하자 아비멜렉이 자신이 온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한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무심코라는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가 예뻐서 아내를 취하고자 한 것이 우연히 그렇게 만나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브라함에게 알게 하신 필연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우연히무심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함과 성실함이 됩니다.

 

룻기 2:3절에서 룻이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 간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의 우연히라는 말은 오늘 본문의 히브리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만 원래의 단어 의미에 비추어보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성실하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걸음들이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추후에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인도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블레셋 사람들의 길로 가면 가깝지만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은 그들이 전쟁을 보면 무서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까봐서 일부러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13:17). 이뿐 아니라 광야를 지나가게 하시면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우게도 하십니다(8:3).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무심코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도하십니다.

 

예레미야 10:23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누가 걸어서 왔습니까? 우리가 걸어서 운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합니다.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의 걸음이 걸어지려면 수많은 근육과 뼈와 관절과 신경과 핏줄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어느 한부분이 고장 나도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잘 걸어 다니셨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의 걸음들이 말씀을 듣게 되는 자리로 걷는 것도 주님이 허락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걸음이 나에게 달려있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우리의 발은 악을 행하는 데만 빠른 걸음들입니다(59:6, 3:14). 그러므로 우리의 걸음을 걷는 대로 내 버려두시면 악으로 달려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걸음들을 인도하셔서 진리로 가게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연히 만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이 들리고 우리가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여 지는 일은 결코 우리의 걸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우연히또는 무심코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만물과 상황과 사건들이 이렇게 고집 센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여 가시는지 그 주님의 손길을 잘 분별하며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