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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4: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2016. 1. 24

 

1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여러분이 목사라면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이런 본문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됩니까? 우리가 대부분 들어온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엘리사의 제자 중에 여호와를 경외한 한 선지생도가 죽었습니다. 그 아내와 두 아들이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생도 때부터 진 빚으로 보입니다. 남편이 죽어버리자 채주가 과부가 된 그 여인의 두 아들을 빚 값으로 데리고 가려고합니다. 이 때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하고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무엇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기름 한 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웃에게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려서 방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빌려온 그릇에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이 이 말을 믿고 그대로 하였더니 빌려온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차고 빚고 갚고 생활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으로 저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 제목이 그릇을 빌리라였습니다. 이 여인이 믿음으로 그릇을 빌리기는 했지만 너무 작게 빌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릇을 많이 빌렸다면 얼마든지 기름이 계속 나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신데 사람이 이것을 제한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네 입을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도 덧붙이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면서 큰 꿈과 비전을 가지라는 말도 합니다. 우리의 그릇이 커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아무리 그릇을 많이 빌려도 방안에 들어가서 방문을 닫고 부어야하는데 옛날 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았습니까? 옛날 시골집 같은 곳에 가보면 저런 곳에서 형제들 몇 명이 어떻게 함께 살았나? 할 만큼 작은 방입니다. 그런 방에 그릇을 빌려다 놓으면 얼마나 빌려 놓았겠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십니까?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사의 제자인데 엘리사도 알고 이 선지자의 부인도 알 정도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왜 빚을 져야 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였다면 전능하신 능력으로 복을 주셔서 부요하게 하시고 많은 사람을 도와가면서 살아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이런 복을 받는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이렇게 빚을 진 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빚을 지고 일찍 죽어버림으로 아내와 두 자녀가 살길이 막막하고 또 두 아들이 빚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면 이것이 간증거리가 되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한 사람의 가정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요세푸스와 유대인들의 다른 기록들에 의하면 여호와를 경외한 이 사람을 열왕기상 18장의 오뱌다로 보기도 합니다. 왕상 18:3~4절입니다.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여기서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고 되어 있기에 그렇게 본 모양입니다.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한 사람인데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겨서 떡과 물을 먹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장관이었다면 뇌물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 이렇게 여호와의 선지자를 목숨 걸고 살려주면서 그들을 먹이려면 빚을 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사에게 온 이 여인이 그 사람의 아내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종이 빚이 진 것과 그 아내의 두 아들이 채주에 끌려가게 되는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따르는 제자들은 참으로 가난한 선지자들입니다. 앞으로도 보겠습니다만 먹을 것이 없어서 들 외를 따다가 국을 끓였는데 그 안에 독이 있어서 먹지 못하게 된 것을 엘리사가 고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가난하였으면 그렇게 했을까요? 어떤 사람이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를 가져왔는데 백 명이 먹을 수 없는 양식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나누어 주라고 해서 나누어 주었더니 먹고 남게 되었습니다. 또 선지학교를 증축하는데 도끼 하나가 없어서 도끼를 빌려와서 나무를 자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엘리야와 엘리사를 따르는 자들이 가난한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21~27절입니다.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이러한 말씀이 북 이스라엘에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은 여호와도 섬긴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속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내용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경제체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면 여호와의 이런 법이 시행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법이 시행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이 시행이 되어도 살다보면 빚을 질 수가 있고 땅이나 사람을 담보로 빚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빚을 변제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2절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히브리 종을 산다는 것은 히브리인이 빚으로 팔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6년동안 일하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물론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6일 창조 7일 안식일, 6년 경작 7년째 땅의 안식, 안식년 7년이 일곱 번 되는 해를 희년으로 하여 모든 빚진 것들이 다 회복되는 제도들이 레위기 25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들이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가난해지고 그렇지 않는 자가 부요해집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모르고 자본주의의 경제 원리로 살아갔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돈을 경외하면서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기에 반드시 한편으로 치우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이렇게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도 이렇게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흘러야 할 땅이 긍휼과 자비를 버리고 자본의 축적을 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34:8~22절입니다. “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21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

 

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입니다. 바벨론이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말을 왕과 고관들이 잠시 듣습니다. 그 들은 말씀은 히브리 종을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앞에서 송아지를 쪼개어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 언약 체결은 종을 해방시키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렇게 언약을 체결하고 종에게 자유를 주니 바벨론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것입니다. 그러자 풀어준 종들이 아까운 것입니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숨 쉴 틈만 생겨도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 언약 백성들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언약을 체결하여 풀어준 종들을 다시 잡아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가 쪼개진 송아지처럼 쪼개질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바벨론 군대를 다시 불러 오셔서 그들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선지자의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는 이 상황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는지 빚으로 종이 되어 팔려가는 내용들과 그 적용과 그 결과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엘리사에게 온 이 여인과 그 아내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종으로 팔려가지 않고 빚을 갚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가 빚에 팔려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가는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것을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달라는 내용임을 마태복음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런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 시대나 오늘이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디모데후서 3:12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삶이란 신약에서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박해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디모데후서 3:1절부터 보시면 말세의 고통 하는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세는 노아 홍수 때에도 있었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도 있었고 바울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선지자의 아들을 종으로 잡아가려고 한 것은 그 채주가 긍휼과 자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했기에 나오는 결과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이 많아지면 당연히 자랑하고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 거역하며 감사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게 됩니다.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 이런 자리에서 돌아서면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핍박을 받는 일이라면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엘리사에게 찾아온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아내와 그 아들이 여호와의 돌보심으로 인하여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겨우 빚을 갚고 생활할 정도였습니다. 오늘날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경 두 곳만 찾아보았습니다만 어떤 모습으로 나옵니까? 고난입니다. 이 두 곳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사는 삶이 고난으로 나옵니다. 이래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시겠습니까? 이래도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이 함께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치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을 탐하기에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이런 욕을 얻어먹으면서 기독교가 힘을 가져야 한다거나 역사 교과서에 기독교의 공로를 많이 넣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욕을 얻어먹는 것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여 받는 것과 같은 그런 욕 얻어먹는 일을 어디서 감히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집행이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이라면 교회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심판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킨다면 이것이 참된 복입니다. 이런 자들은 옛날 바알숭배의 신앙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기에 바알숭배를 하는 자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바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고난들은 영광의 영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 고난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면서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경외하는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