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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3장 망령된 제사 2013. 12. 8


11장에서 암몬 자손의 나하스를 물리친 사울을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추대하여 세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이방의 왕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께 종속되어야 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한 왕은 이방의 왕정체제였지만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자신의 언약 하에서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자기 뜻대로 왕정을 펼치면 왕도 백성도 다 멸망하게 됩니다(12:25). 이것이 길갈에서 나라를 새롭게 한 내용입니다.


13:1~2.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고 되어 있는데 40세라는 글자가 작습니다. 맛소라 사본의 이 부분이 손상이 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 부가하여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21절에서는 사울을 40년간 왕으로 세우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 후에 상비군 3천명을 세워서 2천명은 자신이 믹마스와 벧엘산에 주둔하게 하고 1천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기브아에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3~4.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선제공격하였습니다. 이 정도는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블레셋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이제 곧 전면적인 벌어질 것이기에 사울 왕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히브리 사람들을 소집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도 길갈에 모여서 사울을 따릅니다.


5~7. 블레셋의 군대의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거가 3만 마병이 6천명 이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진을 쳤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으며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도망갔습니다.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는데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고 있습니다. 적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왕을 구하였지만 압도적인 적의 병거와 기병과 숫자 앞에서 도망가기에 바쁘며 두렵고 떨고 있습니다. 인간 왕의 무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12. 사울이 길갈에 있었던 이유는 사무엘이 오도록 기다렸습니다. 삼상 10:8절입니다.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에게 처음 기름 부을 때에 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은 약 2년이 지난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 말을 한 것은 전쟁이나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사울 왕이 이방의 왕처럼 독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고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도록 한 조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무엘이 오도록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7일이 되었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고 백성들을 두려워서 흩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못하였기에 부득이 하게 자신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가져오게 합니다. 번제는 속죄제이고 화목제는 속죄로 인하여 화목 되었으니 그 화목제물을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자가 함께 나누어 먹는 식사가 됩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고 나는 순간 사무엘이 마치 숨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사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반가운 마음으로 문안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축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그 축복의 인사에 아랑 곳 없이 사울에게 왕이 행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사울이 대답하기를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은 쳐들어왔는데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지 못하였기에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사울이 드렸기에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 자신도 제사장 가문이 아닌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다윗도 제사장이 아니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해서 구약과 같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 왕 같은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성도는 다 제사장이기에 만인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사제(司祭) 제도를 철폐한 것이 개혁교회인데 개혁교회의 목사들이 다시 사제가 되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번제를 드리고 났을 때에 사울이 찾아와서 사울을 책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내가 손을 써서 하나님의 뜻을 수정하거나 촉진하거나 늦추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7일을 기다리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언제나 완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7일이라는 완성이며 안식입니다.


그런데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는지를 사울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에 사울은 지금 충분하고 합당한 이유들을 말합니다. 사무엘이 약속한 7일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고 백성들을 흩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는 구하지 못하였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해해 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왜 사무엘이 책망합니까?


그러나 이런 말에 대하여 사무엘은 단호하게 망령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망령(妄靈)되게 행하였다는 말은 한문의 뜻으로는 허망하고 거짓된 영으로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로 다른 곳에서 사용할 때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사울의 제사 행위가 망령된 행위가 되는가 하면 백성들의 흩어짐을 방지하기 위한 민심수습 차원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한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제사를 드림으로 왕이 저렇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왕의 제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미 많이 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소집합니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쳐들어왔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을 잡아 온전한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하러 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히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한 것입니다. 사울도 이러한 제사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렸는데 왜 이번에는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책망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제사는 어린 양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 안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사울은 제사를 이용하여 흩어지는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나님께서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제사의 원래 의미는 상실하고 자신의 왕 됨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용물로 사용하였기에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입니까? 사울과 같은 망령된 예배가 아닙니까?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삶은 내 마음대로 살다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정성을 바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망령된 예배입니다. 이러한 망령된 모습 중에 하나가 일천번제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셨기에 우리로 일천 번의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열왕기상 3:4절입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예루살렘에서 기브온 까지 왜 솔로몬이 제사하러 갑니까? 산당이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직 중앙 성소인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라서 산당에서 제사를 하는데 산당이 크기에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릴 수 있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일천번제(一天番祭)가 아니라 일천번제(一天燔祭)입니다. 이러함에도 일천 번의 정성을 바쳐서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이 바로 망령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사나 예배를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는 짓이 다 망령된 일입니다.


13~15상. 사무엘이 사울에게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기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울 것을 말씀하시고 사무엘은 기브아로 올라가 버립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을 13절과 14절에서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사무엘이 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15절 하반 절에 보시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6백 명 뿐 입니다. 나팔을 불어서 상비군 3천명 외에 수많은 무리들이 왔겠지만 그들만 도망간 것이 아니라 정규군도 다 도망가고 6백명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무기는 어떻습니까?


19~23.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제무기로 무장하지 못하도록 대장간을 다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농기구를 벼리려고 하여도 블레셋에 가서 날을 세워 와야 합니다. 겨우 무기라고 있는 것이 사울 왕과 요나단 에게 있는 칼 두 자루가 전부입니다. 이런 지경에 제사라도 드려서 전에 하나님께서 우레를 내려 적들을 물리치듯이 그러한 도움을 받고자 제사를 드린 것이 망령된 제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가 아닌 나의 정성으로 신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그런 예배가 다 망령된 짓입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요한복음 6:19~26절입니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참 된 예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는데 바로 이 때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때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여 내가 소원하는 것을 받아 내고자 한다면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망령된 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이 에녹과 같은 예배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