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13~46   견고해진 나라   2014. 12. 21

지난주에 다윗의 왕위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죽기 직전에 솔로몬에게 몇 사람을 지혜대로 처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뒤끝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죽기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왕이 된 나라는 다윗의 훌륭함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다윗처럼 간음하고 살인한 자라도 주의 언약을 따라 긍휼을 입은 자들이 그 왕국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시가 다윗의 마지막 말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에 어떤 자가 들어가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때에 이런 찬송가 가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누가 저 천국 문 들어갈까? 네냐 내냐? 네냐 내냐?’ 이 가사를 찾아보려고 인터넷에 검색을 하였더니 우림과 둠밈 이라는 사이트에서 2010년 5월 25일 요한계시록 22장의 ‘성에 들어갈 권세’라는 설교의 본문이 검색되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였습니다. 이 가사의 내용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 다니면 당연히 천국 가는 것으로 여기면서 내가 과연 저 천국에 들어갈지 아닐지에 대한 관심이 과연 있는가 하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속한 사람입니까? 오늘 말씀으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3~17절입니다. “13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14 또 이르되 내가 말씀드릴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16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7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다가 다윗이 솔로몬을 정식으로 왕으로 지명함으로 아도니야는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단 뿔을 잡고서 살려달라고 하였을 때에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한 말이 열왕기상 1:52~53절입니다. “52 솔로몬이 이르되 그가 만일 선한 사람일진대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53 사람을 보내어 그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그가 와서 솔로몬 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 

선한 사람이라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겠지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과 악이 어떤 것인지 밝혀집니다. 아도니야가 원한 것이 결국 왕의 권세를 원한 것입니다. 긍휼을 입고 살아난 자가 다시 아비삭을 구한 것은 이 당시에 전 왕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왕의 계승자임을 보이는 행위입니다. 마치 압살롬이 왕이 되자 다윗의 아내를 취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됩니다. 이것은 이미 인간이 처음 범한 죄가 되는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욕망의 표출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에 처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요구한 것을 밧세바가 들어준 것은 아도니야의 말을 합당하게 여긴 것입니다. 밧세바가 아도니야에게 화평의 일로 왔느냐고 묻자 화평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밧세바 당신도 아시는 바와 같이 다윗의 왕위가 서열상으로도 자기의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자신의 아우의 것이 된 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여호와의 일로 보이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왕이 되려고 사전에 모의를 한 것인데 백성들이 자기를 향하였다고 하는 착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작은 소원이 아비삭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들은 밧세바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시 반역이 일어나거나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윗에게 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인 화평의 나라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밧세바가 솔로몬 왕에게 청하기 위하여 왕에게 나아갑니다. 

18~21절입니다. “18 밧세바가 이르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19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는지라 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밧세바의 이 청을 들은 솔로몬이 어떻게 답합니까? 

22~25절입니다. “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구한 것이 바로 왕권을 요구한 것으로 솔로몬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기를 이런 말을 하였기에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고 하는 자기 저주의 맹세로 아도니야를 죽이게 합니다. 아도니야가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을 시중들었던 아비삭을 자기의 아내로 달라고 한 것은 다윗의 왕위를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다가 실패한 아도니야가 솔로몬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왕위를 요구한 것이 죽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고 다시 왕이 되려고 하는 그 욕망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 언약을 따라 긍휼로만 들어가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도니야의 죽음입니다. 

26~27절입니다. “26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이로되 네가 내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아버지가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27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제사장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쫒아내어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아도니야를 따라 반역에 가담하였기에 마땅히 죽을 자이지만 다윗 앞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매었고 다윗과 함께 환난을 받았기에 죽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할 때에 놉 땅의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을 주고 칼을 준 일로 제사장 85명을 죽입니다. 이때 도망친 제사장이 아비아달입니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피하여 왔지만 아도니야의 편에 선 것은 사독 제사장과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 같으니 그 편에 선 것입니다. 제사장이 권력의 향방을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이것이 버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버림받는 일이 엘리 제사장에게 예언된 일이라고 합니다. 엘리 제사장이 두 아들이 저주를 자청 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제물을 짓밟는 행위는 더 이상 용납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저주가 아비아달에게로 연결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제사장이라도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신약시대의 성도는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1:9). 그런데 제사장이라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면 이것은 제사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따라 이합집산 하는 아비아달 같은 자가 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은 다윗이 받은 그 언약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28~35절입니다. “28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그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으니 이는 그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29 어떤 사람이 솔로몬 왕에게 아뢰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이르되 너는 가서 그를 치라 30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그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아뢰어 이르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31 왕이 이르되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32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33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그를 쳐죽이매 그가 광야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35 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사령관으로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아도니야의 처형과 아비아달의 추방 소식을 들은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에 들어가 제단 뿔을 잡습니다. 제단의 뿔을 잡아도 고의 살인자는 끌어내어 죽이라는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러면 요압의 죄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용서하고 받아들인 아브넬과 아마사를 요압이 죽인 것입니다. 아브넬은 요잡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다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아브넬은 아사헬이 자신을 추격하는 것을 여러 번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사헬이 끝까지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아브넬에게 죽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아브넬이 다윗에게 투항하였을 때에 다윗이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마샤도 다윗은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다윗이 군대장관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자신의 자리를 위하여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도 모르고 자신의 혈육과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행한 이러한 자는 아무리 다윗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그 속셈을 드러낸 것이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에 처형하는 것입니다. 

36~46절입니다. “36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37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38 시므이가 왕께 대답하되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 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39 삼 년 후에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 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여 간지라 어떤 사람이 시므이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종이 가드에 있나이다 40 시므이가 그 종을 찾으려고 일어나 그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드로 가서 아기스에게 나아가 그의 종을 가드에서 데려왔더니 41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말한지라 42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에게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게 하고 경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밖으로 나가서 어디든지 가는 날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도 내게 말하기를 내가 들은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였거늘 43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두고 한 맹세와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느냐 44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네 마음으로 아는 모든 악 곧 내 아버지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45 그러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왕위는 영원히 여호와 앞에서 견고히 서리라 하고 4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매 그가 나가서 시므이를 치니 그가 죽은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시므이도 요압과 마찬가지로 기회주의자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 갈 때에 다윗을 향하여 재를 뿌리며 저주를 퍼 부은 자입니다. 시므이가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이기도 하였지만 다윗이 쫓겨 가는 것을 보고 저주를 한 것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비참함을 조롱한 모압의 죄와 같습니다. 모압의 죄를 모르시는 분은 수요일 저녁 설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실패하고 다윗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올 때에 시므이는 다윗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다윗이 용서를 합니다. 그런데 왜 솔로몬에게 너의 지혜대로 행하라고 하면서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내려가도록 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이런 자도 합당하지 않음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주거제한을 시므이에게 명합니다.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는데 3년이 지난 후에 자기 집의 종 두 사람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간 것입니다. 시므이가 상당한 재력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두 종이 도망을 간 것은 이 사람이 종을 얼마나 학대하였으면 가드까지 도망을 갔겠습니까? 그런데 그 종이 큰 재산이기에 찾으러 간 것입니다. 솔로몬의 명을 잊어버렸는지 예루살렘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가드까지 가서 종을 찾아서 데리고 옵니다. 이 소식을 솔로몬이 듣고서 시므이를 불러서 여호와를 맹세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죽입니다. 시므이는 용서 받은 그 사실보다 자신의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데 이 시므이는 하나님의 용서 받은 그 울타리 안에 살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찾기 위하여 가드로 갔다 왔기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자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살펴본 아도니야와 아비아달과 요압과 시므이를 통하여 무엇을 보았습니까? 우리 속에 들어있는 왕이 되고자 하는 아도니야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기회를 따라 간 아비아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혈육을 중심으로 자기 권력을 위하여 다윗을 따라 나선 요압과 같은 모습이 우리 안에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 보다 재물에 눈이 먼 시므이와 같은 자가 우리들임을 보아야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에 제거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견고하여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면 아도니야와 아비아달과 요압과 시므이의 모습과 같은 것들이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제거당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을 제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이 역사 속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통하여 제거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의지하게 되기에 긍휼을 붙들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닥칠 때에 당황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은혜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1~4절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