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열왕기상 18:7~18 괴롭게 하는 자 2015. 8. 30

 

36개월 동안 가뭄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비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이 회개한 것이 아님에도 엘리야를 통하여 비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알과 아세라가 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주시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괴로움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하신 일인데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는커녕 엘리야를 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아합이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입니까?

 

우선 본문 7~14절입니다.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8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합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뱌다는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게 하느냐고 합니다. 오뱌다는 목숨을 걸고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숨겨서 먹을 주고 살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느냐는 말은 여호와의 영이 엘리야를 옮겨버리면 아합이 당신을 찾지 않은 곳이 없는데 당신이 사라지면 내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바댜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선지자 백 명을 살리고 또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바댜에게 엘리야는 자신을 괴롭히는 선지자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언가 조금만 나를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오바댜는 자기 목숨을 걸고 여호와를 경외하여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살려준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여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기는커녕 나는 나를 사랑한 일 뿐입니다. 이러면 그동안 내가 교회를 다니면 헌신 봉사한 것들이 생각나는 분이 계십니까? 그 헌신과 봉사를 누구를 위하여 한 것입니까?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힌 헌신과 봉사가 아닙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괴롭히는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20절입니다.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 엘리야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오바댜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서 아합에게 보냅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너냐?’고 합니다. 엘리야를 가뭄 기간 내내 원망하였습니다. 엘리야 저놈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고 아합에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잡기 위하여 온 나라를 다 뒤졌지만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있을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나자 말자 하는 말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내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집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알 선지자 400명과 아세라 선지자 450명을 모아오라고 합니다. 과연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인지 분별하자고 합니다. 이 대결은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오늘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괴롭게 한다는 히브리어의 단어와는 다르지만 괴롭힌다는 표현들이 구약에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도 있고 사람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무슨 심술이 많아서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시는 일과 사람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과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을 몇 곳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 결국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창세기 15:12~14절입니다.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사백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괴롭힘을 통하여 출애굽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15:18~19).

 

룻기 1:19~21절입니다.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하나님께서 룻을 괴롭게 하심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언약 안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시편 119:75~77절입니다.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주님이 나를 괴롭게 하심을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성실하게 괴롭히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룻에게 보이신 것처럼 주의 긍휼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7:25~26절입니다. “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2)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아간이 여호와께 바쳐진 여리고성의 물품을 취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아골이라는 말이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사사기 11:35~36절입니다.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입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면 되는데도 믿음이 없어서 잘못된 서원을 하였습니다. 자기를 제일 먼저 영접하는 자를 제물로 드리겠다는 그 서원으로 입다의 딸이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입자의 잘못된 서원으로 그 딸이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27~30절입니다. “27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입다처럼 사울도 여호와의 전쟁에 자신이 금식이라는 행위를 보태려고 한 것이 이스라엘로 곤란하게 한 것이 됩니다. 이 곤란하게 하였다는 것이 괴롭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입다나 사울처럼 오늘날도 자신이 무언가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일이나 교회를 위하여 한다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을 괴롭히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주의 뜻을 분별하며 기다리는 것이 나대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사야 7:10~14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풍전등화가 같은 나라의 운명앞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여호와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 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불신앙을 책망하시면서 주시는 약속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임마누엘의 약속역시 인간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배경으로 나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43:22~25절입니다. “22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괴롭게 여깁니다. 죄짐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며 죄악으로 괴롭게 합니다. 이런 자들을 심판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 허물을 도말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심판의 과정을 통과하고 그렇게 하십니다.

 

이사야 58:1~7절입니다.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이 몸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몸을 괴롭게 하는 금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외식인지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금식은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엉터리 같은 금식이나 헌신이나 봉사를 가지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이런 짓들이 하나님께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은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2:20~23절입니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말라기 2:17절입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오늘날 세상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는 이런 말들이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어쭙잖은 정의감이나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는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되는 줄 아신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15:15, 9:22, 딤전1:16, 벧후 3:15)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하는 아합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아합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합입니까? 엘리야입니까? 항상 성경을 볼 때에 자신을 악인에 대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풍요와 다산을 원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괴롭히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괴로움이 오면 우리는 누구를 탓하고 삽니까? 전부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편 탓이고 아내 탓이고 조상 탓이고 나중에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성실하게 괴롭히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그 열심 앞에 항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괴롭게 하였고 제가 이웃을 괴롭게 하였고 가족을 괴롭게 한 사람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