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부]

[방송사정상 녹음은 못했습니다.]


열왕기상 18:21~40 둘 사이에서 2015. 9. 6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누구입니까? 19~29절을 보시면 아합 왕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아합의 아버지 집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들을 따랐기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되는지 결판을 내어보자고 아합에게 제안합니다. 사람을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엘리야에게 오라고 합니다. 아합이 사람을 보내서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읍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를 봅니다. 이들이 왜 이세벨의 상에서 먹습니까? 이세벨이 시돈의 엣바알이라는 왕의 딸입니다. 그가 모태로부터 바알의 신앙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이런 왕비의 상에서 먹는다는 것은 이러한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을 빌어주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왕의 권력을 반대하면 스스럼없이 모함하여 죽이는 자가 이세벨입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비위를 맞추어주면서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나 전국적인 목사 장로 기도회나 교계의 큼직한 행사들을 할 때에 그 순서에 끼워 넣어 달라고 로비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권력자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서 가문의 영광이 되는 양 걸어두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21절을 봅니다.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어느 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따르라고 하는데도 백성들이 말 한미다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만 섬깁니까? 바알도 섬깁니까? 이스라엘의 신앙이 바알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 머뭇거린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북 이스라엘도 이름으로는 성전이라는 곳이 두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신앙이 금송아지 신앙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혼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22~24절입니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엘리야가 제안을 합니다. 송아지로 잡아서 나무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자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라고 하자 백성들이 그 말이 옳다고 합니다. 엘리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응답이 내렸으면 하는 소원들이 있기에 불로 응답하시는 엘리야의 하나님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도 불로 응답을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다리 걸치고 있는 우리들의 머리위에 불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용감하게 불로 응답하여 달라고 한 것은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불로 응답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불로 응답했다면 그렇게 구한 자들 위에도 불이 떨어질 것입니다.

 

25~29절입니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여기서 종교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불로 응답하도록 기도하라고 엘리야가 말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이 거절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못하겠다고 하면 해보지도 않고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엘리야의 말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숫자를 믿고 또 자신들의 종교성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도 여러 가지 능력과 표적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얼마든지 그러한 능력들을 나타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 기적도 지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둘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확인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나 여기에 있고 능력이 많은 신이 저기에 있다고 상정하고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바치면 신이 응답한다는 체제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경쟁력이며 기도는 인생역전이며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할 때에 결국은 지극한 정성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이 종교성의 원리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바치라고 합니다. 목사가 이런 종교를 전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자입니다.

 

26절부터 다시 봅시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 850명이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여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제단 주위에서 뛰놀고 있습니다.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 섬길 때도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정오가 되기까지 부르짖어도 아무른 응답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이같이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없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첫째는 무당들이 굿하는 장면입니다. 밤을 새워 북을 치고 대를 흔들며 춤을 춥니다. 그냥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펄쩍 펄쩍 뛰기도 하고 칼을 들고 칼춤을 추시고 합니다. 영험하다는 무당들은 작두를 타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과 지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무당들과 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그 기도하는 내용이나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바치라는 모습은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응답받을 때 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고 부르짖고 헌금을 바치고 응답이 올 때까지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이 쉬면 기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살기를 기도합니까? 자신의 뜻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까? 그런 기도는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소원이루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입니다. 이제 엘리야의 기도를 봅시다.

 

30~32절입니다.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갈멜산에 제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제단들은 무너지고 온갖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단들만 가득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데 야곱의 열두 아들의 수대로 돌 12둘을 취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12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위에 송아지를 올리고서는 물 네 통을 떠서 그 제물과 제단위에 붓게 합니다. 세 번을 이렇게 함으로 물로 열두 통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팠는데 그곳까지 물이 두루 흐르고 가득찬 것입니다. 인공적으로 불이 붙을 가능성이 없게 합니다.

 

36~38절입니다.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제단을 수축하고 물을 붓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1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면 말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대결은 바알이 참 하나님이나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냐는 대결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여호와께 기도하기를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 돌이키심을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자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39~40절입니다.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바알이나 아세라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엎드리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아세라 선지자의 이름을 빠졌지만 바알의 선지자라는 말 안에 이들도 포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서 죽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편이 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만약 오늘날 이렇게 불로 응답하신다면 지금 ,양다리 걸치고 있는 우리 모두는 불이 내려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절대로 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양 다리 걸치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보고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지 않고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였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함께 생각한 것입니다. 메시아의 왕국이 이 지상에서도 힘 있는 나라로 드러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심으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을 받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미움을 받습니다.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싫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세상의 종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와 세상의 종교 이 둘 사이에서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시겠습니까?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육체의 따라 사는 길은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삶입니다. 어느 곳에서 사시겠습니까?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십자가와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들이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나의 배를 섬기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까? 나의 욕망을 따라 땅의 일과 땅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 분이 그 십자가로 이끌고 계시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당황하지 마시고 내가 주님의 십자가로 끌려가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32~33절입니다.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예수님께서 이 일을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십자가로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