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3:1~14 개혁이 가능한가? 2018. 7. 1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 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종교개혁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1.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3. 오직 은혜(Sola Gratia) 4. 오직 믿음(Sola Fide) 5.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이것이 가톨릭교회에서 개혁한 중요 원리입니다. 이러한 개혁의 원리를 말하지만 그러나 완전한 개혁은 아니기에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인간으로는 온전하고 완전한 개혁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온전하고 완전한 개혁이 일어난다면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봉독” 1절의 그날은 성벽을 봉헌하는 날로 봐야 합니다.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읽어주는데 그 책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율법을 읽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양식과 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습니다.

 

이 일을 마치고 느헤미야는 바벨론 왕에게로 돌아갑니다. 느헤미야가 유다로 온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입니다(2:1, 5:14).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있다가 바벨론으로 돌아간 때는 아닥사스다 왕 32년입니다(5:14, 13:6). 총독으로 시무한 기간은 12년입니다. 성벽을 다 봉헌하기 전에 언약을 새롭게 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언약을 어기면 저주를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언약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 10장에서 언약을 새롭게 한 내용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십일조와 헌물을 하겠다는 언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바벨론에 돌아가서 얼마 있다가 돌아왔는데 돌아와 보니 10장에서 언약을 새롭게 한 내용을 다 어기고 있습니다.

 

4~5절입니다. “봉독 산발랏과 도비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성전을 짓는 일이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방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잠시 바벨론에 다녀오는 동안에 도비야가 성전에 자기 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그 방은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이방인 도비야를 위하여 방을 내어준 것입니다.

 

6~9절입니다. “봉독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돌아간 때가 아닥사스다 왕32년입니다. 왕에게 돌아간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한 것입니다. 바벨론에 돌아간 며칠 후에 왕에게 요청을 하였기에 몇 년 있다가 유다로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넉넉잡아도 일 년 안에 왔을 텐데 그 사이에 이방인 도비야가 성전의 큰 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일이기에 느헤미야가 심히 근심하면서 도비야의 세간들을 그 방 밖으로 다 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원래의 기능으로 돌이켰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맹세를 하고 언약에 도장을 찍어도 이렇게 배반하는 것입니다.

 

10~14절입니다. “봉독 느헤미야가 또 알아보니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를 꾸짖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고 책망을 하자 방백들이 레위인들을 불러 다시 제자리에 세웁니다. 그러자 다시 온 유다가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여놓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자기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 일을 했다고 하나님께 자기를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기도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봉헌 후에 한 사람이라도 죄를 깨닫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한 사람이 됩니다.

 

예레미야 5:1절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루살렘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없었기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 자신을 객관화 한 것이기에 한 사람에 자신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바벨론에 멸망하였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대로 70년 만에 돌이켜 주셨습니다.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또다시 언약을 배반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혼자라도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중보자적인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과 자기 백성을 홀로 구원하여 내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는 자리에도 같이 가겠다고 큰 소리 친 제자들이 모두 잠에 빠졌습니다. 두 번이나 깨어 기도하라고 깨워주셨지만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7:20~24절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결과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홀로 기도하시고 이루어내시는 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함을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하여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13: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악에 익숙한 인간이 선을 행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스 인이 피부색을 어떻게 바꾸겠으며 표범이 그의 얼룩반점을 어떻게 변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고치고 개선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속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22~25절입니다.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것은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일한 것도 없이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짐을 받는 복을 말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고치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 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내 줌이 되었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소식은 인간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소식이기에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들을 당하게 하심으로 이 말씀을 믿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제도를 개선하시는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시고 짊어지시고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여야 하는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자족하면서 살기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고전11:16). 이러한 복음은 개혁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1:4~5절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우리가 개선이 가능하였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고 모범만 보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2:20,21).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게 지금까지 증거가 되고 있는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넘겨주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요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