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5:1~14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2018. 9. 16

 

1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지난주에 다른 데로 말미암아라는 제목으로 4장을 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부분을 말씀을 드리지 않아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낯선 구원은 십자가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은 죽음이기에 거리끼는 것이며,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인간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이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2:14~15). 이러한 구원은 인간도 천사도 전혀 예측 못한 다른 데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낯선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수산궁의 유다 백성들이 삼 일간 금식을 하고 에스더도 금식을 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 앞에서 섭니다. 왕이 어전에서 출입문을 대하여 앉아 있는데 왕후 에스더가 등장합니다. 이때 아하수에로 왕이 화가 잔뜩 나 있다면 어느 누구도 귀찮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의 홀을 내밀지 않으면 왕비는 죽습니다.

 

2절입니다. 왕이 에스더를 보는 순간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금 홀을 내미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홀을 만집니다. 사람의 감정이 사람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왕이 에스더를 보고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잠언 21:1절입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이 논에 물을 대듯이 여호와께서 임의로 왕의 마음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도 주님께서 다루십니다. 그러니 아하수에로 왕의 눈에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왕이 보기에 에스더가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였으면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목숨을 걸고 온 것은 중요한 소원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소원이 무어이냐고 물었스니다. 그런데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매우 사랑스러우므로이 말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눈에 은혜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에스더가 후궁에 있을 때에도 모든 사람들의 눈에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2:15). 그리고 왕비로 간택될 때에도 왕의 눈에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2:17). 그러므로 보기에 매우 사랑스럽다는 것은 보는 자들의 눈이 은혜롭게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롭게 보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왜 지금의 남편과 아내를 만났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때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랬다는 말을 합니다. 그때는 주위에서 말려도 안 됩니다. 최고로 사랑스러운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다보니 콩깍지가 벗겨졌는지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사랑스러워 보이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상대가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저도 아내와 딸들이 있습니다. 가장 사랑스러울 때가 언제인지 가족들이 다 압니다. 혈육의 사랑이 아니라 더 큰 사랑스러움으로 보는 것은 복음에 반응을 보일 때입니다. 가족밴드에 묵상 글을 올리고 반응을 보이면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셔서 사랑스럽게 보는 것과 인간 자신의 정욕의 눈으로 사랑스럽게 보는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사무엘하 13장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사랑합니다. 다말은 압살롬의 동생입니다. 압살롬도 이스라엘에 그만한 미남이 없을 만큼 잘 생겼으니 그 여동생도 아름답습니다. 암몬이 배다른 동생이기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상사병이 들어서 매일 말라갑니다. 그때 간교한 사촌 요나답의 꾀를 받아서 다윗 왕이 병문안 왔을 때에 다말에게 과자를 만들어 오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강간을 합니다. 그 후에 처음 사랑할 때 보다 더욱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정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함이 이렇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다윗의 집안에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은 다윗을 징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인간의 정욕으로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그 아름다움의 추구가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19~28절입니다.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4)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5)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3)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3)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5)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헤롯이 자기 생일날 의붓딸의 춤을 보고서 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선물을 구하라고 합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이 딸이 자기 어머니이게 무슨 선물을 구할까 하니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두려워하여 가두기는 하였지만 죽이지는 못하였는데 아내가 요한을 죽이려고 벼루고 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니 헤롯이 사람들 앞에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그 딸에게 주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욕으로 인한 아름다움에 취하는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것들을 문학으로 다루고 영화로 만들어 즐기는 인생들입니다.

 

본문 4~8절입니다. 에스더가 즉석에서 소원을 말하지 않고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시라고 합니다. 왕이 에스더의 말대로 하만을 급히 불러서 에스더의 잔치에 갑니다. 잔치의 술을 마시면서 에스더에게 다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곧 허락하겠다고 합니다. 다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에스더는 다음 날 하루 더 잔치에 오시면 저의 소원을 말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9~12절입니다. 하만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합니다. 모든 기쁨이 갑자기 분노로 바뀝니다.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고 왕후의 잔치에 자기 혼자 초대받은 그 기쁨이 갑자기 모르드개로 인하여 매우 분노합니다. 우리도 이렇지 않습니까? 잔치를 하거나 무슨 행사를 할 때에 다 좋았는데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으로 모든 좋았던 것들도 다 무너지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데 하만은 참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영광을 그의 친구들과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후의 잔치에 참여하고 내일도 잔치에 간다고 기분에 들떠서 말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그렇게 자랑하다가 보니 아까 대궐 문에 본 모르드개가 또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만은 지금 왕의 다음으로 높은 지위와 많은 자녀를 낳은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다음으로 자녀가 많은 것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영광과 자랑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신하들 중에 단 한 명이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요나도 박 넝쿨 하나로 인하여 성을 내어 죽어도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가 어떤 결론으로 나오는 것입니까?

 

본문 14절입니다.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1)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와스디 왕후의 폐위사건과 함께 여자가 집안을 주장하지 못하게 법을 선포하였는데도 하만의 아내 세레스와 하만의 친구들이 25미터나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서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즐겁게 잔치에 가라고 하자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워 둡니다.

 

자신의 모든 영광과 부요함이 왕 다음으로 가진 자이지만 단 한명이 자기에 절하지 않는다고 분노하니 그 모든 영광으로도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만의 이 분노에 장단을 맞추는 그의 아내와 친구들에 의하여 모르드개를 죽일 25미터의 기둥을 세웠지만 그 기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면 분노가 왜 일어납니까? 성경에서 최초로 분노하여 살인한 자는 가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들은 자기중심의 선악을 판단하며 살기에 왜 나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고 동생의 제사를 받아주느냐는 것으로 인하여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4:5).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에게 불구하고 동생을 죽입니다. 자기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가 온 세상이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건드리기만 해라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표정들입니다. 타락한 본성, 선악을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면서 보기에 나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작은 것 하나로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집안과 나라까지 망하게 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하는 자들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눈이 은혜로운 눈이 됩니까? 어떻게 해야 나와 상대방을 사랑스럽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봅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아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20장에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종들을 보내니 세를 주지 않고 때리고 죽여서 최종적으로 포도원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20:13)을 보내면 존중하리라고 생각하고 보냈지만 그들이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살해한 자가 정말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이 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만을 사랑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부르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3:17). 변화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들었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17:5).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죽였으나 당신은 그 죽음으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5:6) 죄인 되어 있고(5:8) 원수 되어 있을 때에(5:10) 십자가로 사랑을 확증하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요한일서 4:7~11절입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렇게 사랑을 말하는 자가 십자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 유다로 가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 이라고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살라버리자고 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9:54). 야고보와 요한 둘 다 성격이 불과 같은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아너게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셨습니다(3:17). 이랬던 사람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성령을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면 매우 사랑스럽게 형제와 자매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의 눈길이 우리의 눈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이 충만한 곳이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