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4:1~16:14 여호와를 찾게 하며 2017. 9. 3

 

1 아비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2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4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5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6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아사 왕에 대하여서는 열왕기나 역대기에서 좋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는 역대기에 비하여 아주 간단하게 아사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에서는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하면서 우상을 제거한 일과 남색 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낸 일과 우상 숭배하는 태후까지 폐위하여 버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과 남북 전쟁 시에 아람 왕 벤하닷을 의지한 것을 언급하지면 별 평가를 하지 않고 대체적으로 좋게 봅니다.

 

역대기에서는 아사 왕이 여호와를 찾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게 하였다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오늘은 여호와를 찾았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역대기가 여호와를 찾으면 살 것이고 배반하면 여호와께서도 버리실 것이라는 언약을 말하는 이유는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일차 청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버림으로 나라가 망하였지만 다시 돌아온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호와를 찾아야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와를 찾지 않으면 망한다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열왕기에서는 다윗을 따랐다는 말을 합니다. 아사 왕이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게 하였다는 것은 그 율법을 따라 우상들을 제거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나라가 평안함을 누렸습니다. 왕이 선과 정의를 행한 것은 자신이 여호와를 찾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게 한 결과로 평안이 주어집니다.

 

7~8절입니다. 아사가 여호와를 찾았기에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면 벌써 망해도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주어진 그 평화의 시기에 성읍을 건축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이렇게 성읍을 건축하고 된 것도 여호와를 찾았기에 평안을 주신 결과라고 합니다. 그리고 군대도 유다의 삼십만, 베냐민의 이십팔만, 합계 오십팔만의 군대가 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납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과 병거 삼백 대를 몰고 유다를 공격합니다.

 

9~15절입니다. 백만 군대와 오십팔만의 군대입니다. 거의 배가 되는 군대이며 그들은 강력한 무기인 병거 삼백 대를 끌고 왔습니다. 이럴 때 아사는 여호와를 찾습니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이렇게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구스 사람이 패배하고 전멸을 당합니다. 아사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5:1~7절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는 아사 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아사랴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며,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너희가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의 승리도 여호와를 찾은 결과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았을 때에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게 하고 손을 약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찾으면 주어지는 상급이 무엇일까요? 평안입니다.

 

8~9절입니다. 아사가 선지자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버립니다.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척결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제거하자 북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사와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호와를 찾는 모습이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탐심이 우상입니다(3:5). 여호와를 찾는 길이 탐심을 버리는 길입니다.

 

10~15절입니다. 언약의 갱신이 일어납니다. 남 유다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남 유다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를 찾는 모습을 보고 함께 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아사 왕 십 오년 셋째 달에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언약을 새롭게 합니다. 언약의 갱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한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를 찾지 않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하고 찬양합니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하였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갱신이 여호와를 찾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고 사방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새 언약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평안을 맛보며 누리게 됩니다.

 

16~19절입니다. 언약을 갱신한 후에 이 언약을 따르지 않은 태후를 폐위하여 버립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는 죽이기로 하였는데 차마 태후를 죽이지는 못하고 폐위를 시킨 것입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태후 직을 폐위하는 것이 여호와를 찾았기 때문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못하였지만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구별한 물건을 드렸습니다. 이 때부터 세 삼십 오년 까지 전쟁이 없었다고 합니다.

 

16:1~6절입니다. 아사 왕이 끝까지 여호와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공격하며 라마를 건축합니다. 유다왕 아사에게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사는 여호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전과 왕궁의 곳간의 은금을 내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3절에서 내 아버지와 당신 아버지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는 것이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체결하여 벤하닷이 북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이스라엘이 물러가고 라마를 건축하던 재료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합니다. 이러한 일이 언약의 배반임을 선지자 하나니가 책망을 합니다.

 

7~10절입니다.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를 책망합니다.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를 의지 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하였기에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찾고 의지하였다면 아람 왕의 군대조차 아사 왕의 손에 붙여주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구스 왕의 백만 대군을 여호와를 찾고 의지함으로 물리친 왕이 왜 아람 왕을 의지하였느냐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백성 중에서 몇 사람도 학대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펴보실 때에 참으로 여호와를 찾고 의지하는 신실한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구약전체의 증언입니다.

 

11~14절입니다. 아사 왕 삼십 구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위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병이 들면 의사를 찾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의원이라는 자들이 무당과 다를 바 없는 자들입니다. 주술로 치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5:11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앞에 왔을 때에 엘리사는 직접 나가지도 않고 종을 보내어 말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몸에 일곱 번 잠그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화가 나서 한 말입니다. 이 당시에 의사를 찾는 다는 일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이 여호와를 찾지 않고 무당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배반입니다. 그러므로 약 2년 후에 죽습니다.

 

다윗을 따라 정직하게 선과 정의를 행하였다고 하는 아사 왕도 이 모양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은 결과가 나라의 평안과 전쟁의 승리를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갱신하면서 언약을 배반하면 죽이자는 결의를 하였지만 바아사 왕이 공격하였을 때에 여호와를 찾고 구한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 아람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병이 들자 여호와를 찾은 것이 아니라 무당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실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잘 살아갈 때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다고 하는 그 지점에 찾아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찾아오시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길도 없고 목자도 없고 캄캄한 지경입니다.

 

에스겔 34:1~8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8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이것이 여호와를 찾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9~16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목자를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17~22절입니다. “봉독 목자가 양을 괴롭히는 것만이 아니라 양 사이에서도 힘센 양이 약한 양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러한 목자를 치시고 양 사이에서도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양들은 어떤 형편입니까? 목자에게서도 치이고 양에게서도 치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누구만 찾겠습니까?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양이 되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신다고 하면 우리는 연약한 양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사자와 호랑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목자가 찾아오시는 양은 사자나 호랑이 같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양처럼 연약한 양이 되게 하셔서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연약할 때라야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23~31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의 왕은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목자 자신이 여호와를 찾아야 하며 백성들 곧 양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게 하여야합니다. 그런데 백성의 왕과 지도자들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나마 선하다고 하는 아사도 제대로 목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를 보내셔서 자기 양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0:7~16절입니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찾는 양이 되자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기 위하여 오십니다. 선한 목자가 우리를 찾아오실 때에 우리는 길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구하시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로 찾아오시는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찾아진 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