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7:1~9 바른 길을 간 요담 2017. 11. 12

 

6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역대기는 유대인들의 성경분류대로 하면 가장 마지막 성경이 됩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와는 상당히 다르게 기록이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버린 결과가 어떠한지, 회개하고 돌이킨 자들이 어떠한지를 남 유다의 왕들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본 세 명의 왕들은 처음에는 잘 하였지만 나중에 잘못한 왕들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보는 세 명의 왕은 부친과 반대로 가는 모습입니다. 요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른 길로 갔으며,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길로 갑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바른 길로 갑니다. 이러한 대비를 통하여 무엇을 알려주십니까?

 

회개하고 바른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남의 탓 하지 말고 지금 너희가 회개하고 바른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마샤를 볼 때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하여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가지 않고 각자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는 다는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에게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의 모든 책망의 말씀들이 나의 이야기로 들려져야 회개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책망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2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웃시야는 처음에는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나중에 강성하여짐으로 교만하여 성전에서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발하여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별궁에 거하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본 요담은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웃시야처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고 합니다. 열왕기에 보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 한 사람이 잘하니 강성해집니다.

 

본문 3~9절입니다. “3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4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5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6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7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8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십육 년이라 9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성전의 위쪽 문을 건축하고 여러 성벽을 증축하였으며 적들을 싸워 이기고 조공을 받게 된 것은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걸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록 산당을 없애지 못하여 백성들이 부패하였지만 왕 한 사람이 정직하게 걸음으로 인하여 나라가 강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내 한 사람이 잘하면 우리 집안도 우리 회사도 우리 교회도 잘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인 왕이 바르게 걸어가면 백성들이 복을 받고 왕이 바르게 하지 못하면 백성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5:6~11절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되고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요담 이야기에서 갑자기 로마서로 온 이유는 요담은 정직하게 행하였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담이 바른 길로 가니 나라가 강성하여 진 것에 대한 말씀을 해석하기 위하여 로마서의 말씀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회개나 돌이킴은 의미가 없는가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을 드리면 개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우리 개인보다 우리의 머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신은 누가 왕 노릇하고 있는지를 모르게 합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나에게 달려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 있기에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복음의 선포와 복음을 듣고 믿음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주가 되셔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정과 선택보다 더 중요한 권세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5:12~14절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한 사람 아담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이 모습이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15~17절입니다.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였는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이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임을 인식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살아있다고 하지만 이미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느 종교와 학문이 이 세상 자체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놓여있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가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영광을 주겠다고 하는 이 사실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기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원하신 언약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20~21절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구약 전체를 통하여 율법으로 인하여 죄가 드러남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죄가 드러남으로 인하여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오늘 이 땅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조차 생명도 아닌 것과 썩을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이런 곳도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게 하시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어느 한 말씀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는 자들임을 율법을 통하여 알게 하십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자신이 죄 아래 갇힌 자임을 아는 자들은 은혜의 왕 노릇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길이 되셔서 우리를 그 길 안에 넣어서 데리고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