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4:1~49 레위인의 직무(2) 2020. 2. 2

 

1 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집계할지니 3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 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3장에 이어 4장도 레위인의 직무에 대한 내용입니다. 3장은 제사장의 역할과 레위 인이 회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4장은 성막을 이동할 때에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고핫, 게르손, 므라리 순서로 성막의 기구들을 운반하게 합니다. 이 일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나이는 30세부터 50세까지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8:24절은 25세부터 되어 있습니다. 25세부터 일을 배우고 30세부터 직접 일을 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50세 이후는 돕기는 하지만 직접 메는 일은 금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이동할 때에 아주 구체적으로 역할 분담을 합니다.

 

1~20절입니다. “봉독고핫 자손의 임무입니다. 총감독은 제사장 엘르아살입니다. 제사장들이 지시하고 덮어주면 고핫 자손들은 채를 꿰어 이동하는 일을 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걷어서 증거 궤를 덮고 그 위에 해달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어서 채에 꿰어 이동합니다. 다른 기구들도 포장하는 방법과 이동하는 방법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물(聖物)을 레위인이 만지거나(15) 보면 죽는다고 합니다(20). 왜 죽는다고 합니까? 여호와의 거룩함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을 성막과 성물을 통하여 보여주시는데 결론에서 보겠습니다.

 

21~28절입니다. “봉독게르손 자손의 임무입니다. 감독은 이다말입니다. 고핫 자손들은 성소와 지성소 안에 기구들을 운반합니다. 이들은 다 메고 가야 하는 것들입니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은 무거운 것들이기에 수레에 싣고 가기 위하여 수레를 배당받는 것은 7장에 나옵니다. 게르손 자손은 성막의 휘장들과 덮개와 해달의 가죽 덮개와 회막 휘장들을 주로 맡게 합니다.

 

29~33절입니다. “봉독므라리 자손의 임무입니다. 여기서의 감독도 이다말입니다. 이들이 맡아야 할 것들은 성막의 가장 무거운 물건들입니다. 장막의 널판과 띠들 기둥과 받침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장 무겁기에 수레를 네 대나 받습니다(7). 각 지휘자 아래 직무들을 담당시킵니다.

 

34~49절입니다. “봉독 레위기 4장은 일 개월 이상의 레위인 전체의 인구를 조사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성막을 이동하는 일에 봉사할 30세에서 50세까지 조사합니다. 고핫 자손은 2750, 게르손 자손은 2630, 므라리 자손은 3200명입니다. 성막을 이동하는 일에 아론의 아들들 제사장을 빼고 전체 8580명입니다. 8580명이 각자의 임무를 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대로 성막을 해체하여 이동합니다. 그런데 다시 세우려면 므라리 게르손 고핫 순서대로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내용은 레위인들이 성막을 이동할 때에 성물(至聖)을 만지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물 중에 가장 거룩한 것은 지성소(至聖所)에 둡니다. 지성소에 증거궤(21), 법궤(1), 하나님의 궤(34), 언약궤(44)가 있습니다. 왜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지 봅니다.

 

사무엘상 6:19~20절입니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3)(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이 내용을 보려면 4장부터 봐야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신다고 보고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엘리 제사장 시대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4천명이나 죽고 패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메고 오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메고 오니 이스라엘의 사기가 충천합니다. 적들이 왜 저런가 하고 보니 언약궤를 메고 온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신이 진영에 들어왔으니 큰일이라고 합니다. 애굽을 친 신임을 알고 있기에 어차피 전쟁에 패하면 종이 될 것이니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해서 전쟁을 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대패합니다. 무려 삼만 명이 죽고 언약궤마저 빼앗겨 버립니다. 언약궤를 메고 간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 앞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언약궤는 종교적인 주술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언약궤 홀로 적을 물리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신인 다곤의 신전에 언약궤를 들여놓으니 그들의 신상이 언약궤 앞에 엎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세워놓았는데 다음날 보니 그 신상이 목과 손목이 잘려 신전 문지방에 걸쳐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때부터 문지방을 밟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서 언약궤를 다른 곳으로 옮기니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이 일어납니다. 언약궤 때문에 전염병이 온 것인지 알기 위하여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젖먹이는 암소 중에 멍에 매지 않은 소에 수레를 메어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냅니다. 소가 울면서 벧세메스로 곧게 가는 것을 보고 언약궤 때문에 재앙이 일어난 것을 압니다.

 

그런데 벳세메스에 도착한 언약궤를 사람들이 들여다보다가 (오만)칠십 명이 죽었습니다. 왜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죽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만지거나 보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봤다는 것은 언약궤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죽는 것입니까? 언약궤 안에는 율법의 돌 판이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처음 돌 판을 받아올 때에 금송아지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율법대로 적용하면 그들은 다 죽임당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돌 판을 던져서 깨뜨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영원하시기에 다시 돌 판을 만들어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언약궤 안에 담아두고 그 위에 속죄소 뚜껑을 덮어 둔 것입니다. 그 속죄소에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가서 일곱 번 뿌리는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피 뿌림이 없이 언약궤 뚜껑을 열고 그 법을 보았으니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6~11절입니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1)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블레셋에서 스스로 돌아온 언약궤를 다윗이 왕이 되어 모셔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병 삼만 명을 동원하여 수레에 싣고 멋있게 모셔 가려고 하였는데 그만 소가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보호하려고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다가 즉사합니다. 다윗이 이것을 보고 분하여 그곳 이름을 베레스웃사라고 합니다. 다윗이 왜 화를 냈습니까? 초라한 곳에 있는 언약궤를 자신이 마련한 특별한 곳에 모셔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거절한 것에 대하여 분노한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어긴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가야 하는데 수레에 싣고 갔으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정병 삼만 명으로 언약궤를 호위하여 가면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 것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보호하여 가는 모양입니다. 마치 전리품을 취하여 가는 모양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이런 다윗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이 다 이런 모양입니다. 삼십 명의 목회가 아니라 삼만 명의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소를 뛰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궤가 떨어지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막으려고 웃사가 잡았다가 즉사합니다. 다윗이나 웃사나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거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언약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두게 합니다. 가드 사람이라면 블레셋 사람입니다. 블레셋 출신인데 이스라엘에 귀화하였던지 아니면 포로로 잡혀 와서 정착하여 살았든지 오벧에돔의 집에 떠맡긴 것입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서 적을 물리치고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마치 폭탄 돌리기 게임 하듯이 서로 돌리다가 이스라엘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런 언약궤를 다윗 왕이 모셔 가려다가 실패하여 가드 사람의 집에 맡겨 버립니다.

 

그런데 가드 사람 오벳에돔이 억지로 맡았지만 그 집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다시 모셔갑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런 복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얼마나 두려운 언약궤입니까? 들여다보다가 죽고 만지다가 죽는 언약궤입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처음에 실패를 하였기에 율법을 따라 제사장들이 에봇을 입고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언약궤를 메고 가는데 아무 일이 없자 다윗이 춤을 추면서 갑니다. 이런 다윗을 미갈이 보고 비웃다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왕비가 됩니다. 다윗의 마음을 모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와 함께 하여주시는 그 기쁨을 미갈이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15:24~26절입니다.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도망가는 중입니다. 언약궤를 따라 백성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궤를 도로 성안으로 메고 가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입으면 도로 그 궤 있는 곳을 보게 하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시면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만져도 죽고, 보고도 죽는데, 그 언약을 다 이루신 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9:24~28). 참 목자 안에서는 언약궤를 말하거나 생각지 않습니다(3:15~16). 예수님이 언약이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내 산의 두려움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자 이신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12:18~24). 이 피가 최후 심판의 기준입니다(12:2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