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원인

기원전 926년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유다와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다. 국가 이전의 영웅 시대도 아니고, 막강한 통일 국가도 아닌 이스라엘은 약 2세기 동안이나 분열 왕국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이스라엘은 왜 분열되었으며, 분열 이후 남북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었는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분열 왕국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분열 왕국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반역의 무리였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다윗 왕조야말로 사울 왕국을 찬탈한 반역자였으며, 각 지파의 전통과 독자성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침해한 달갑지 않은 통치자들이었다. 남북 분열은 다윗 왕조의 시각에서는 하나의 반란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의 회복이며, 다윗 왕조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이었다.

첫째, 정치적으로 남북 분열의 원인은 저항을 획책한 르호보암(열왕기상 12장)에게서보다 솔로몬의 실정()과 그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사울의 왕권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얻어 세워졌다. 그러다가 다윗 왕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지지(사무엘기하 2:4)로 왕위에 오른 후, 나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와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사무엘기하 5:1~3).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유다와 이스라엘, 즉 남과 북의 지파 간의 세력 갈등과 관계의 구별이 있었다.

다윗 왕은 수도를 남쪽의 헤브론으로부터 북쪽의 예루살렘으로 옮겨 남북의 모든 지파를 하나로 통합하여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만들려고 애썼다. 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남북의 종교적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집단들은 별개의 세력을 가지고 중앙 정부에 협력하거나 또는 반대하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언제나 새로운 왕의 등극 과정에서 막후 세력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다윗이 죽고 갈등 끝에 왕위를 이어받아 등극한 솔로몬이 취한 일련의 개혁 조처들은 매우 편파적인 것들이었다. 우선 그가 임명한 국가 고급 관료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 대장 브나야 등은 모두 남쪽 유다 출신들이었으며, 그가 제거한 사람들은 경쟁자였던 아도니야를 비롯하여 그를 따랐던 민병 대장 요압, 아나닷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 등 주로 북쪽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지역 간의 편차와 차등 정책은 북쪽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을 가지고 국가 내에서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부왕 솔로몬과 같이 차등 정책을 발표하자, 북쪽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분열되게 된다(열왕기상 12:11, 16).

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요구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무엇인가?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받을 유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저마다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아, 이제 너는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열왕기상 12:16)

둘째, 남북 분열의 원인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이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을 때,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적이 있었는데, 솔로몬이 이 사실을 알아채자 그는 이집트로 피신하였다(열왕기상 11:29~40). 아히야의 이 발언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인 것으로서, 여로보암의 반역 행위를 조장하였다.

야훼 종교의 기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지만, 북쪽의 실로는 적어도 법궤가 머물던 곳으로서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다윗은 이 법궤를 남쪽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버렸다. 그리고 실로의 성소는 블레셋에게 파괴되었다(cf. 예레미야서 26:9).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지방 성소들의 중요성이 점차 약화되면서 지방 성소의 종교 세력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남북이 분열된 후 북이스라엘이 취한 정책을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북이스라엘 지도자는 예루살렘 중심적인 종교 권력을 분산시키고자 벧엘과 단에 성소를 건축하여,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막고, 레위 제사장들을 쫓아 내고, 지방 성소의 제사장들로 대치하였다(열왕기상 12:25~33).

셋째, 경제적인 문제는 남북 분열을 촉진시켰다. 솔로몬의 과도한 건축 사업 및 군사력 증강은 재정 지출을 확대시켰으며, 이를 위한 과다한 세금 징수와 강제 노동은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역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여로보암의 저항은 솔로몬의 실정()을 반영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열왕기상 11:26~12:33).

사실 북쪽 지파의 사람들은 남쪽 유다 사람들보다 인구도 훨씬 많고 군사력도 더 강한 사람들이었으나, 힘이 분산되고 지리적으로 단결되지 못한 이유로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였다. 차별적인 대우로 말미암아 소외되었던 북쪽 사람들의 불만은 솔로몬의 과중한 세금과 강제 부역이라는 고통을 계속 당하면서 결집되어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남북 분열에 한몫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 왕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세력 약화를 틈타, 군사적 정복과 외교적 우호 관계라는 양면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달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삭 1세는 솔로몬에게서 쫓겨 온 여로보암을 보호하고 환대하였다(열왕기상 11:40). 또, 시삭은 솔로몬에게 대적하다가 쫓겨난 에돔 왕의 아들 하닷을 보호해 줌으로써(열왕기상 11:14~22), 은근히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나아가, 시리아, 두로,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주변 국가들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으며, 기회가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분열의 원인 (이스라엘사, 2007. 9. 12., 미래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