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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우목사
2017.06.08 09:57

이 내용에 대한 설교본문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요한계시록 7:4-8 인 맞은 자들 2009. 5. 17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오늘도 해가 떴습니다. 이 땅이 그대로 있습니다. 나뭇잎들은 무성해 집니다. 이러면 여름이 어김없이 오는 줄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이 불에 타서 사라져 없어진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29-33절입니다.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대하여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십니다.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알듯이 예수님의 말씀하신 징조들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뭇잎이 무성하여 지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휴가나 수련회를 준비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마을로 갔고 예수님 혼자 우물가에 계셨을 때 한 여인이 물 길러 나온 것입니다. 한낮에 온 것은 이 여인이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온 것입니다. 그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참된 예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인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가서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밭을 보라고 하십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눈에는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말씀은 이 세상에 부는 심판의 바람을 네 천사가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섯째 인이 이미 떼어졌는데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왜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인치는 작업이 마치게 되면 네 천사가 바람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재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각설탕이라는 영화에서 말들의 경주를 보았습니다. 말들이 출발선 앞에 작은 문이 달려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문이 열리지 않아서 못 나가고 있습니다. 출발신호와 함께 그 문이 열리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네 천사가 바람을 쥐고 있다가 놓아버리면 여섯 번째 인의 재앙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인을 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주의 택한 백성들이 다 돌아오게 되면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인을 맞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기에 사람들은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자기 구원의 욕구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인을 맞은 사람이냐 또는 과연 그 인 맞은 자의 수에 들어가는가 하는 생각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구원욕구 때문에 온갖 이단들이 144000명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자기 집단의 종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144천이라는 확정된 숫자가 주어지는 것은 모든 인간의 조작을 거부하는 숫자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4절을 봅시다.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외에는 인 맞을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열두 지파의 명단 속에 단 지파는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또 여러 가지 추측들을 많이 합니다만 왜 열두 지파를 정하고 그 지파들 가운데 일만 이천 명씩만 인을 치는 것입니까? 일만 이천 명 외에 혹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유다지파는 가장 많은 숫자를 가진 지파인데 상대적인 형평성을 고려해서 더 많이 인을 맞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냉정하게 12지파에서 각 일만 이천 명씩 십사만사천명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냉정한 말씀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10처녀의 비유를 봅시다. 똑 같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단지 기름을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여 늦게 달려온 다섯 명의 처녀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습니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어디에 간 것입니까?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노아홍수를 봅시다.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었는데 그 동안 노아가족 외에는 단 한 사람도 방주에 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의 조짐을 미리 보여주시든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산사태가 나고 집이 수몰되고 하는 일들을 자주 일으키시면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에 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노아만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냉정하신지 홍수가 나기 일주일전에 방주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일주일 후에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합니다. 위의 궁창에 있던 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지금 천사들이 사방에서 바람을 잡고 있는 것이 노아 홍수 때와 같다고 봅니다. 단지 재앙의 내용과 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마치 화장실의 천정에 담겨있던 물을 손잡이 당기면 쏟아져서 배설물을 쓸어가듯이 물이 쏟아져서 청소를 하였다면 이제는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은 씻어내지만 불은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씻는 정도가 아니라 태워버리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의 요란함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기꺼이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만들어진 영원한 처소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44000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확정된 숫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면 절대로 사람들이 보태거나 빼거나 할 수가 없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사람의 유전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은 뽑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혀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이든 장로이든 권사이든 집사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으신 자는 아무리 그럴듯한 폼을 잡고 교회당에 들락거려도 뽑혀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다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면 나는 뽑힐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인 맞은 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런 걱정이 되신다면 아직도 자기 구원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을 맞은 자 즉 하나님의 창세전의 예정을 따라 택함을 입은 자라면 그 증거가 성경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한 마디로 고난인 것입니다. 자신이 욕심을 부리다가 당하는 것은 개고생입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면서요? 그런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느 한 사람 고난이 닥치지 아니한 사람이 없습니다. 자꾸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성경을 보니 구약의 인물들을 가지고 성공과 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요약하여 증거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 성도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렇게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서 죽고 또 바울사도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만드셔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인 맞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144천명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단체에 소속이 되어서 144천명에 들어오지 못하면 그들은 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14절을 봅시다. 144천명 다음에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나타나니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144천은 휴거하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 환난을 당하여 순교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얻는다고 함으로서 지금 우리 단체에 들어와서 죽도록 충성하여 휴거하고 환난을 당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그런 곳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다 큰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두지파에서 각 12천명이란 사람의 의도대로 되는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택하심을 따라 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이 숫자에 들어가는 열두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인데 야곱은 자신의 야망이 꺾어지고 환도 뼈가 위골되어 평생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의지해야 되는 그 시점부터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땅에 대한 야망이 깨어지고 하늘에 대한 약속에 그 몸에 새겨지는 것이 약속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야곱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야곱의 열두 아들들조차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빠지기도 하고 순서가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열두지파의 144천은 버릴 자를 버리고 택할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숫자이지 우리가 임의로 정하는 숫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참 감람나무 일부가 꺾인 자리에 돌 감람나무가 접붙여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 맞은 자의 숫자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만을 따라 되는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항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이런 조치에 항의하지 아니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1-28(7:24-30)에 보시면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계속하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주인의 아들이 먹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옳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백부장도 이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44천이란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로서 확정된 숫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 된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드러내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144천을 문자적으로 혈통적인 유대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계시록 앞에서 유대인의회가 사단의 회(2:8,3:9)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유대인이나 표면적인 할례가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어야 하며 할례는 마음에 하는 신령에 있는 것이지 의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2:29-30).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3:29).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6:16). 그러므로 144천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구원받은 모든 숫자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능히 아무라고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바로 144천에 대한 해석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확정된 숫자이지만 우리가 보면 능히 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5-40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를 않습니다. 믿지 않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은 반드시 예수님께 올 것이며 그들을 결코 내어 좇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단 하나도 더함이나 빠짐이 없이 각 지파에서 12천이라고 정확하게 계수하듯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9-12 환난과 어린 양의 피 2009. 5. 24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전직 대통령이 자살했습니다. 사람들마다 견해가 엇갈리겠지만 진중권교수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흠집을 남긴 것은 유감스러운 사실이지만, 전과 14범도 멀쩡히 대통령 하고, 쿠데타로 헌정파괴하고 수 천 억 검은 돈 챙긴 이들을, 기념공원까지 세워주며 기려주는 이 뻔뻔한 나라에서, 목숨을 버리는 이들은 낯이 덜 두꺼운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가신 분의 명복을 빕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은 내가 만나본 정치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분이었습니다. 참으려고 하는데 눈물이 흐르네요.”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되어서 언급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하고 명복을 빈다고 합니다. 어제 구역예배 때에 어느 집사님이 눈물이 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눈물이 납니까? 그 사람은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조문과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그 위로가 없다면 대통령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참된 위로를 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지난주에 보았던 144천명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단체들이 사기를 치는지 그들의 공통점이란 오직 자기들의 단체에 들어와서 자기들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144천에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144천에 들어가지 못하면 온갖 환난과 재앙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니면서 어느 정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들의 교리에 따른 조건에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함으로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지난주 오후에 사무엘서 성경퀴즈 시간에 다시 확인을 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두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해서 어떤 심판을 받게 됩니까? 두 아들이 언약궤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소식을 듣고 엘리 제사장 본인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며느리는 아들을 낳다가 죽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죄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자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죄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모두가 엘리와 같은 꼴을 당하여도 아무도 항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 심판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소견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욥의 고백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이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구원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아 나오는 큰 무리가 찬양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0절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흰옷이란 자기가 흰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것은 이미 승리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큰 무리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9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144천에 대한 장면을 보고 나서 큰 무리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큰 무리란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에 의하여 구원받은 숫자로서 사람이 더 하거가 빼거나 할 수가 없는 숫자인 것입니다. 그 수의 해석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봅니다. 이들이 나오는 곳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열방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2:1-3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복과 저주의 기준을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곳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런 세상에 아브라함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인지 먼저 결론부터 봅니다. 갈라디아서 3:6-9절입니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함을 받으려고 하면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10).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이방인에도 포함이 되는 것을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3:16절입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셀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결코 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데 무엇을 못 세시겠습니까? 하늘의 만상을 다 수효대로 불러내시고 이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40:26).

 

창세기 15:5-6절입니다.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뭇별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하늘의 별을 어떻게 다 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말씀인데 그 자손을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방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복을 받는데 그 숫자는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이 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때 볼 것을 바라보다가 보고 기뻐하였고(8:56) 모세도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리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고(7:37) 다윗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22:43). 그러므로 다윗도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해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역대상 27:23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이십세 이하의 수효는 다윗이 조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음이라여기서 다윗이 이십세 이하는 조사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비록 사단의 충동을 받아 인구를 조사하지만 어른만 계수하고 20세 이하를 계수하지 아니한 것을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언약하신 내용이 성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9-12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아 나오는 무리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것입니다. 이 큰 무리의 특징은 흰 옷을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찬송은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든 천사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천사들이 무슨 소리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까?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흰 옷 입은 큰 무리의 찬송을 듣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흰 옷 입은 무리들의 이 찬송소리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사가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1: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하나님의 약속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셨다는 것이 찬송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화답송이 12절입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13-14절입니다. 이제 한 번 더 확인을 합니다. 이 무리가 누구냐고 장로 중에 한 사람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이 흰옷 입은 무리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고 합니다. 요한이 당신이 알 것입니다. 그가 요한에게 알려줍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이 세상에서 환난의 길이며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제자들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얼마나 고난이 심하였든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무엇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의지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도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환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환난이 없이 만사형통하다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맞습니다. 그 선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기에 반드시 고난이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환난을 당합니다. 그 환난 중에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빼내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이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져 나가게 하심으로 무엇만 남기시는가 하면 어린양의 피만 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결국이 어떤 모습입니까? 15-17절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주님의 섬김을 받았기에 그 살과 피를 주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섬김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섬김은 생명의 관계이기에 참된 기쁨의 자리입니다. 이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처를 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세상의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은 자아의 죽음입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한 삶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성경갈피에 오직 예수” “나는 없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합류되는 삶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보지지만 영원한 하늘의 참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들이 큰 환난에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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