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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15-22        그러나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면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해석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과 배경, 자기 지식,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죄 아래 있는 상태에서 작용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한계를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타내고자 하신 뜻과 논리를 좇아가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나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알고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의 입장을 집어넣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가도록 합시다.



본문 15절에 보면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점은 어느 때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마지막 한 주간의 화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더욱 자극하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헤롯당 사람들이 총 공격을 해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은 죄와 충돌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거부감 자체였습니다(요즘 아이들 말로 토나온다는 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인간들이 자기 종교를 지키고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죄인들을 거리끼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복음은 죄인들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지도자들을 거리끼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예수님과 성전의 지도자들과 갈라놓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인즉 이런 것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7절).


이 질문을 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자”,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는 자”라고 간사하게 아양을 떨었습니다(16절).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아서 이렇게 말하였다기보다 자신들의 질문에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울타리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렇게 진실되게 가르치니 우리가 하는 질문에도 결코 헛되게 거짓으로 답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어떤 일로도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란 철저히 율법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며 로마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젠가 메시아가 나타나면 로마 정부를 뒤엎고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롯당은 로마의 정부에 의해 살아가는 정치적인 집단입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과 그 복음을 거부하고 싶은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서로 사상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도 예수님을 죽이자고 하는 일에는 일치단결하는 것이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관점에서도 어긋나지 않고 정치적인 집단인 헤롯당의 요구에게 어긋나지 않는 답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유대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로마에 세금을 거부하라고 해야 할 것이고, 또 헤롯당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로마 정부에 철저히 세금을 바치라고 답변해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계략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18-21절).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는 돈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시 로마 돈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면 많은 설교들의 제목이 ‘그리스도인의 납세 문제’ 또는 ‘하나님과 정부에 대한 성도의 의무’ 이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종종 강단에서 국가에 세금을 바쳐야 할 것은 탈세하지 말고 철저하게 잘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의 기업가는 그리스도인이 탈세하지 않고 철저하게 세금을 내면서 기업을 운영함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회사를 설립하였다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탈세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은 정부에 세금을 정확하게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세금을 잘 바치고 탈세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는 자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의 권력은 짐승, 즉 궁극적으로 사단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잘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금 문제, 즉 정부에 세금을 낼 건 잘 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약으로 말씀하시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언약으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강조점은 앞뒤 양쪽에 다 있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상의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원래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 앞에 헬라어 ‘카이’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 ‘kai(카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그리고’, ‘또는’, ‘이에’, ‘그러나’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장의 문맥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대부분이 이 말을 ‘그리고’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나’로 해석해야 맞다고 봅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에는 당시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를 신격화하고 있었습니다. 즉 너희가 로마의 황제에게 속하였고 그가 베푸는 것으로 먹고살고 있다면 로마의 황제 형상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의 정부에 속하였고 로마 황제의 형상에 속한 것이라면 로마의 정부에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가 아니라) 그러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성령께 이끌려 받으시는 시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0일 내내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대표적인 첫 번째 시험이 무엇입니까?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이 말씀은 신명기 8:3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8장을 찾아보겠습니다.


육신은 떡 즉 밥을 먹고 영혼은 말씀을 먹는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떡(만나)을 주셔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5병2어의 표적을 체험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26-27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썩는 양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만나가 무엇인가 하면 말씀이라는 의미이고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본문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가이사에게 일부 바칠 것은 바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였습니다.

이 마태복음 본문의 문맥에서 22:37-4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하고 뜻을 다하여야 합니다. 남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고 일부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24에 의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도 로마 정부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바치느냐 하나님께 바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에(18절) 그런 일에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쓰는가? 예수님이 물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4: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2: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주일 중에서 하루? 소득의 전체에서 십분의 일?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잘 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으로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이 죽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세상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을 원합니다. 세상은 한 대 맞으면 두 대 이상으로 응수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한 대 맞으면 반대편도 돌려대라고 요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왕따가 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한 자녀로 사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 하늘의 권세에 장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의인인 체 하는 존재였는데 하늘의 의에 굴복되어 십자가의 의를 덧입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산다는 것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지는 만큼, 살아지는 동안 주님만을 위해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소유인 줄을 아는 자를 두고 성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주성교회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