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녹취는 군포의 조승혜 권사님께서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녹취한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ㅇㅇ께!!


성경은 무엇이며, 성경은 왜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지?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알게 된 당신은 어떻게 고백하며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에 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왜 태어났습니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 중 아무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고 보니 내가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나를 태어나게 했을까요? 우리는 부모님이라고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그럼 그 부모님은 누가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쭈~욱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과 하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이 천지 만물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이 천지만물도 인간도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아들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창세전에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세계를 묵시라고 하고 창조의 세계는 역사라고 합니다. 이 역사는 역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묵시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으며 묵시에 의하여 결론 내려질 것입니다. 이 묵시를 다른 말로는 계시라고 합니다. 이 묵시와 계시를 기록한 것이 성경이며 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을 fiction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증거 해야 합니까? "성경은 스스로를 증거 하는 책" 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에게만 성경은 열려집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자들은 성경을 보아도 문자적으로는 읽을 수 있지만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누구에게는 살아있는 문자가 되고 누구에게는 죽은 문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말씀을 보고 가르쳐도 하나님이 택한 자들만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씀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묵시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가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 이 모든 것들은 묵시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태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달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태양과 달을 신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시편 136편을 보면 “하늘과 땅과 빛과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해와 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와 달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은 피조물이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아담으로 하여금 그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 때부터 입니다. 그 결과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인간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선과 악을 구별하며 모두 자기가 신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물은 나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모든 세상은 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세상을 타락한 인간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날씨가 좋다. 날씨가 나쁘다. 무엇으로 구별하고 있습니까? 환경이 좋다. 나쁘다. 무엇으로 구별하고 있습니까? 늘 자신을 중심으로 구별합니다. 내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자신의 남편도 아내도 좋다 나쁘다를 무엇으로 구별합니까? 나에게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선과 악이 구별됩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모든 중심의 주최는 내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한문 중에 “나”라는 글자인 “아”(我)자가 있습니다. 손수 변에 창 과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찌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한 글자만 봐도 인간의 역사, 개인의 역사, 국가의 역사까지 다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공격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아버지가 적에 의하여 죽으면 아들이 힘을 키워 복수를 합니다. 보복당한 쪽은 또 보복을 합니다.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는 일입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예로 들겠습니다. 일본은 섬나라 입니다.일본인들은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섬나라라는 특성의 역사 속에서 일찍부터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어려서부터 자녀들을 이렇게 교육시킵니다. 큰소리 치지마라 / 조용히 해라 /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 / 그것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화해의 정책이며 서로간의 약속이었습니다. 외국인이 볼 때 이런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외부에 의해서 억지로 눌려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 눌려진 욕구가 때로는 무서운 모습으로 분출해서 가끔씩 끔찍한 뉴스가 나오곤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또 개인에게도 다 있습니다.


결국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 존재이유를 알지 못하는 자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세상이 나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그 상황이 되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했을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환경에 처해지지 않은 것이 오직 주의 은혜일 뿐 내가 착해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11;36“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묵시가 역사를 창조했다는 말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손에 창을 든 “나”들이 모여 있는 세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왜 죽입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셔서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선택받은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럼 가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아! 나는 죄인이라서 내 제물은 받아주시지 않는구나” 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왜 나의 제물은 받지 않고 동생의 것만 받아주는가? 그런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노로 동생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신 선택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죄를 다스릴 힘이 인간에겐 없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 가인이 낳은 아들이 에녹입니다. 에녹이 성을 쌓았습니다. 가인과 에녹의 후손들이 각양의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각종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집안에서 살인이 또 일어납니다. 살인을 저지른 라멕이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이 7배이지만 나를 죽인 자는 벌이 77배이다” 라멕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자기는 상처를 입었을 뿐인데 상대방은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또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 이야기는 “나를 건드리면 죽이겠다”는 나의 이야기이고 세계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일들은 평화를 말하는 교육과 정치로 바로잡아질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누군가가 허물어야만 했습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 화목제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이 얼마나 싫은지 아시나요? 나의 왕 됨을 무너뜨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왕이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이세상은 가짜 주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에서는 포도원농부의 비유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종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었더니 그들이 주인의 종을 때리고 상하게 하여 쫓아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이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원은 우리의 것이 될 꺼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이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반드시 심판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의 축소판 모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과 그 당시 세계 최강대국 로마가 합동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죽인 주최는 누구입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주체가 된 ”나“들입니다.


예전에 비해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탐심과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성공해야 되겠다. 좀 더 부자가 되겠다... 는 등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 욕망이 있든 없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똑같습니다. “나는 나 밖에 몰라”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 할 줄 모르는 위선자이며 죄인입니다. 어떤 이는 친절하고 자기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매사 조심스럽습니다. 겸손해 보입니다. 그래도 자아는 똑같습니다.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언젠가 상영되었던 영화의 내용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픽션이지만 일본과 한국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계에서 지구를 공격해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한국과 일본은 하나가 되어 외계에서 온 침략자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모습의 나와 내가 연합해서 예수가 이 땅의 주되심을 막기 위해 2000년 전 손에 손에 창을 들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주인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니야! 나는 2000년 전에 태어나지 않았어! 아닙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와 계신 성전들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와 계신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바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을 죽인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일은 늘 남을 탓하고 미워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그 예수님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전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이다. 이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여 죽였다는 것이 빠지면 이런 예수가 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가 저기 있습니다. 자! 예수님 내가 당신을 믿어 줄 테니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접근하게 되어있습니다.


죄는 자기의 주최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진리관은 나입니다. 나의 존재가치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자는 돈을 원합니다. 병든 자는 건강을 원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은 영원한 생명을 원합니다. 원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구별된 고급화된 문화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반드시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 내셨다.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삶으셨다.” 라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반드시 2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그 복음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거나 그를 향해 돌을 던져 버립니다. 싫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 때 회개하는 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주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 성령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성령이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 성령께서 사람을 감동시켜 사람에 의해서 기록하게 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으로만 알게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나는 당신을 죽인 자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죽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보다 도덕적으로 더 괜찮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한자도 병든자도 어린아이도 노인도 대학교수도 공부를 못한 무학자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를 죽인자로 드러나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죄인이 의인이 되어 그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내가 주인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진짜 주인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내가 네 주인이다. 의인(義人)이란 글자가 있습니다. 나위에 양이 올려 져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는 글자는 손에 창을 들고 남을 죽이는 나위에 양이 올려 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할 때 “예수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 유월절 밤에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그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갔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모든 집의 처음난 자는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의 장자로부터 맷돌질 하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이 어린양이 누구 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구약의 모든 성경말씀은 이 어린양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다시 그 구약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린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에 오실 어린양의 예언이며 증언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요한입니다. 그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구약의 모든 성경의 증언이 세례요한의 손끝을 통해 이 한마디에 담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재림하실 것입니다. 오셔서 온 세상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미 죽은 자는 부활할 것이며 살아있는 자는 변화된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 심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어린양의 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나위에 예수그리스도를 덮어쓰고 있어야 합니다. 유월절이 그림자로 보여주었던 예수그리스도를 덮어쓰고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피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어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의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내가 구원을 얻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남을 구제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심판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불법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서입니다. 이처럼 심판받는 사람들도 예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천지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자도 심판 받는 자도 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1;12~14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노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흑암의 권세아래 태어났습니다. 내가 주인이 된 세상이었습니다. 나 뿐 만아니라 옆 사람도 주인 된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그 사랑의 아들이 주인 된 나라로 이미 완성된 묵시의 세계 속에서 옮겨 주셨습니다. 그 아들로 인해 우리는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골로새서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시니 /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통치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앞에서 묵시가 역사를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묵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창조주이신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원인이 예수그리스도 라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하여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방황하게 됩니다. 그 무엇을 다 해보아도 우리 삶에는 절대 만족이 없습니다. 창조의 목적인 예수를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 하셨는지 조차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도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땅의 삶이 고달프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나아서 천국을 소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릴 것이 많은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성경을 보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째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나의 이름이 높아지고 거룩해 지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는 입버릇처럼 매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사업이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것” 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제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속에 우리의 염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늘 우리가 소원하는 우리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십니다.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나는 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성령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구하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구하고 있는 나의 뜻이란 거의가 탐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구원을 얻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나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정성을 바쳤다면 그 것 또한 죄가 됩니다. 그것이 탐심이라는 우상입니다. 선과 악은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는데 우리는 선과 악을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가 주인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다 우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알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지식만 받습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받으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게 해 달라고 말씀을 볼 때마다 기도해야합니다.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맘에 새겨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것이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부터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보겠습니다.


언약을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묵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역사는 보이는 세계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묵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묵시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는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 약속은 언제 주어졌을까요? 디도서1;1~3 에서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사도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갖도록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하고 찾고 원하는 바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나은 삶, 즉 이세상의 지위와 부와 영광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하나님의 영원 전 약속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자들도 진리나 영생을 바랄 수 있습니다. 추구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사후 세계를 준비한 무덤입니다. 어마어마한 건물입니다. 사람들은 다 권력을 가지려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의 영원한 사후세계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중국의 시황제가 만들어 놓은 무덤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10/1도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불사약도 구했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영생에 대한 소망을 희미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영생개념은 자기 존재의 불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들의 진리와 영생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부르시면 살아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임이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살아있는 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입니다. 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그들은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들은 이미 영원 전에 약속이 되어있었습니다.


디도서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천지만물이 지어지기 전입니다.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것입니다.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디도서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십니다.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다. 바울이 전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전도를 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내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런데 십자가란 어떤 것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저주받은 죽음이며 이방인들이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란 반드시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세워 놓았지만 그 십자가의 도를 전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미련한 것이라고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능력이라고 붙드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영원 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데 그 구원이란 우리를 이 세상과 분리시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둠의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빛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빛이 왔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익숙하고 어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빛을 몰아내었습니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 빛이 예수님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시고 우리가 죽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내가 복음을 듣고 교회에 온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택하고 믿을 수 있는 모든 능력들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걸음도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는 자기의 행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우리가 이런 복음의 말씀을 읽게 되고 듣게 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기 싫다고 구원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말씀에 무엇이 가장 걸림돌이 됩니까? 자기 자신이 방해가 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방해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자신의 주인이라면 왜 자신의 삶을 자신이 계획한 대로 운영해 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어 갈등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조차 어찌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하신 것입니다. 정말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으로 아십니까? 믿어지시나요? 그것은 절대로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설교자나 전도자의 능력이 아닙니다. 영원 전에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약속하신 일이 때가 되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우리가 한 것이 없이 높은 분으로부터 그냥 받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갚을 수가 없습니다. 갚아 낼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납니다. 이 은혜는 이웃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미 2000년 전에 예수그리스께서 이 복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뻐하는 것들은 모두 썩어질 것들을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썩어짐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썩어질 것에 종노릇 했습니다. 죽음이란 곧 썩어짐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애를 씁니다.


일설에 의하면 시황제가 죽지 않으려고 납을 먹었다고 합니다. 납은 썩지 않게 방지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납중독으로 더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죄 된 세상에서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하나님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기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 것은 잠시 동안 갖는 우리의 감정일 뿐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순간 완성이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택한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 빛이 존재합니다. 나는 너를 구원하리라! 이미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이미 묵시세계는 완성되어 있습니다. 때가 되어 영원 전에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뭘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신 약속의 완성입니다.

요한복음6;37~40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 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 하시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자만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주는 자를 다 구원해 오너라!”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자들을 다 구원해 내십니다. 그 구원하시는 방법은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 이것이 영원 전에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그 약속이 이뤄진 결과가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 펼쳐져 있는 마당과 같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이 역사속의 하늘이 마지막 날에 사라진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땅도 불태워져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오셨지만 묵시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다니엘서에 예수님이 인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니엘이 신약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자기 아들 이삭의 죽음과 살아남을 통하여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 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듭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 노아도 장차 올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것을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430년 후 모세 언약이 나옵니다. 그 다음 다윗언약.. 그다음 새 언약이 나옵니다. 새 언약은 구약에서 이미 약속된 것입니다.


이 구약의 언약을 요약하면 2가지 언약이 됩니다. 하나는 은혜의 언약이고 하나는 행위의 언약입니다. 은혜의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고 행위언약은 상호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은혜의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또 다시 행위 언약인 모세 언약을 주신 것입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세 이후 다윗도 일방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율법이 아닌 새 언약의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되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마태1;1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모세의 역할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은혜로만 구원 얻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이 모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영원 전에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담에게 영을 보내서 아담이 예수를 증거 하게 됩니다. 역시 노아에게도 그리스도의 영이 보내져서 노아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들어갑니다.


요한복음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 성경이란 구약을 말합니다. 이 같이 모든 구약의 성경이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증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만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집니다.


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시대가 이 신약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모든 구약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전도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절기도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시편도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사랑의 노래 아가서는 더욱더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사도들도 지금의 우리도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영원전의 약속이 이때에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온 땅은 예수그리스도의 손길로 충만합니다.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걸음을 주께서 인도해 가십니다. 천지만물을 보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영원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제 복음이 거의 다 증거 되어 갑니다.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한국까지 오는데 약200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날 수를 계산할 수 없이 빠른 시간 안에 어느 곳에나 다 갈 수 있습니다. 비행기로 자동차로 인터넷을 통해 정말 빠르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내가 다시 오리라” 하나님과의 약속은 예수님이 이미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 완성을 이 역사 속에서 펼쳐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영원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택한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 자녀를 십자가로 구원해 내십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됩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십니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낼 것입니다.


우리 주님 곧 오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아직 안 오셨을까요? 아직 구원받을 자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 찾기까지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일에 복음을 먼저 들은 자들을 도구로 부르십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부르십니다. 그 영원에 복음을 들은 자는 함께 묶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복이라고 합니다. 이제 복음이 다 증거 되면 이 역사는 사라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이 있습니다. 죽어버리면 역사는 사라집니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남을까요? 내가 살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역사를 펼치는 것이요 죽어서 내 인생의 역사를 접으면 하나의 점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묵시는 영원하지만 역사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면 우리가 생명처럼 붙들었던 세상의 역사들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그 영원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접속된 자 그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믿으면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로 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것을 영원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로 보게 됩니다. 온 세상은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영원한 것들을 붙들라고 우리를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저런 질병이 올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픔이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이 정말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당신을 꼭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누려고 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입니다. 성경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지금까지의 말씀과 앞으로 전개될 언약에 관한 말씀(창원극동방송 설교 윗부분에 원고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길어서 함께 올리지 않았습니다)은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님이 창원극동방송에서 약8개월에 걸쳐 설교한 말씀과 일본집회에서 증거 한 말씀을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Play스토어에서 창원늘푸른교회 어플을 설치하거나 YouTube를 통해서 목사님의 성경강해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창원 늘푸른교회 홈페이지 www.evergreen1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