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에서 캠 코드로 녹음이 되어 하울링이 좀 있습니다. 원고를 참고 하여 보시라고 올려놓습니다) 

 

 

 

2남전도회 주관 수련회

 

 

    

주제: 몸의 부활과 재림

 

일시: 2016. 6. 5~6

장소: 마산가톨릭교육관

 

 


대한예수교장로회 늘푸른 교회

www.evergreen17.com

 

     

일정표

 

2016. 65

오후 3시 교회출발

오후 4시 수련장 도착 방 배정

오후 4~6시 산책 및 휴식

오후 6~7시 저녁식사

오후 7~10시 저녁 집회

오후 10~ 교제 및 취침

 

66

오전 8~9시 아침식사

오전 9~12시 오전 집회

오전 12~1시 점심식사

오후 1~ 각자 집으로

 

 

목차

몸의 부활과 재림 ........................ 3

 

읽을거리

몸의 부활(이장우) ........................ 16

부활이 없으면(신윤식) ........................ 21

재림(노요한) ........................ 25

 






 

몸의 부활과 재림

 

1. 묵시와 역사의 이해

 

유한이 무한을 파악하거나 포섭할 수가 없습니다. 묵시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피조물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을 스스로 알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기에 오직 은혜의 선물로만 주어집니다. 이러한 선물을 받는 자들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한 자들입니다(11:27, 1:17).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한 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된 자들의 소망은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다서 1: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11: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린도후서 4: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베드로후서 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요한복음 8: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마태복음 22: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시편 110:1)

 

2. 성령이 임함으로 거듭남

 

성령이 임함으로 거듭나는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기에 부활이라는 표현을 할 수가 있지만 이것은 몸의 부활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함은 몸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요한복음 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3)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 위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은 위에서 난다는 말씀이며 이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물은 곧 말씀입니다. 성경은 같은 내용을 다른 말을 사용함으로 내용을 분명하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기에 다양한 표현으로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에베소서 5:26절의 말씀이나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여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11:3) 보면 물로 씻어 몸을 깨끗하게 하듯이 말씀이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5: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지금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자는 살아납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무덤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옵니다. 이때가 재림의 때로 몸의 부활을 입어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나 마리아는 마지막 날 부활 곧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한 부활을 믿었지만 지금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심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단들처럼 지금 육신이 영생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생명과 부활안에 있습니다. 잔다고 한 것은 묵시적 시간으로 보시면 됩니다(강의안 읽을거리 몸의 부활참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습니다(16:7~12). 진리의 성령 곧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가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16:13) 성령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알리시며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십니다(16:14,15).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이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14:20).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된 관계 속에 우리도 참여되는 것입니다(17:11,21,22).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고전 12:3).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빠 아버지로 부르신 그 하나님을(14:36) 우리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8:15, 4:6).

 

베드로전서 1:3, 23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가 거듭나면 산 소망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 복음으로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일하심이며(1:20) 여기에 성도가 동참되는 것입니다(2:5,6).

 

로마서 8: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을 받은 자들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몸이 부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탄식하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순서상으로는 먼저 부활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인 묵시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에 시간과 상관없이 순식간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자들을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탄식하면 몸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고린도후서 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자는 이 땅에서 탄식하며 몸의 부활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함으로 거듭난 자들은 이 땅에서 목 베임을 당한 자로서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어떻게 이 역사의 한 순간만 왕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6: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곧 재림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삼위일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 17:

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어린 양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 백마 타고 나타나시는 분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라고 합니다(19:16). 그러므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십니다. 이 분이 신약만 만왕의 왕과 만 주의 주가 되신 분이 아니십니다. 구약에서도 주님이십니다(10:17, 2:47).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13:8),

 

요한계시록 20: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우리는 천년 왕국이라는 말을 워낙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공중휴거라는 말과 7년 대 환난이라는 말들은 다 세대주의적인 해석에서 나왔습니다. 온건하게 해석한다고 하여도 역사적 전 천년설로 해석을 합니다. 저는 무 천년설로 이야기 했습니다. 무 천년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천년 왕국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좀 더 시야가 넓혀졌습니다. 그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곧 역사와 영원세계에서도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천년 왕국이라는 것도 이 역사 속에서 구약까지 포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1절의 태초가 같은 단어로 겹쳐서 보면 구약도 신약도 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말씀은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사탄이 이 땅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이 사탄의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역사하지만 하늘에서 쫓겨났기에 결박된 상태로 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2)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3)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하늘에서 쫓겨난 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봐야 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는 십자가의 승리는 묵시 속에서도 승리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로 옥의 영들에게도 복음이 증거 된 것입니다(벧전3:19,20 비고 창6:2, 고전5:5). 그러므로 하늘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남으로 하늘나라에는 참소가 없습니다. 이 하늘나라를 그리스도 안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8:1).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입니다(1:13).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말씀의 검에 의하여 자신의 머리가 베어지는 자들입니다. 머리란 생각하는 기관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6:5, 8:21).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과 생각들입니다(고후10:4,5). 이러한 우리의 이론과 생각들이 말씀의 의하여 드러나고 베어져야 합니다(4:12). 이렇게 목 베임을 당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며 이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왕이란 세상의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후2:9).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가(벧전1:10~11)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를 거듭났다고 하는 것이며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지 않은 자는 천년 왕국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둘 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천년 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목 베임을 당하는 자들인데 이들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생명책에 기록이 없는 자들은 천년동안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들은 이 땅에 태어나서 산다고 하여도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어 재림하시면 이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기에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을 확대하여 보면 묵시와 창조와 십자가와 거듭남과 종말과 재림과 영원한 심판이 한꺼번에 다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3. 몸의 부활

 

몸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지만 논리상 이해를 위하여 분리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이미 본대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며 이러한 몸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영화 곡성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된 말씀이 38~3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순간이동을 하시고 벽을 통과하시지만 살과 뼈가 있고 음식을 드셨습니다. 유령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가 바로 이런 내용을 증언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성령이 임하면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몸의 부활은 아직 영광을 받은 부활의 몸이 아닙니다. 영광을 입으신 부활의 몸은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땅에 엎드리게 된 분이시며(9:4), 사도요한도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는 분이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17). 그러므로 성도도 몸의 부활을 입어야 이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보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의 부활은 재림과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아주 명명백백한 몸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내용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자들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그러나 차례대로 된다는 것은 논리상의 순서이지 시간상으로는 묵시적인 사건이기에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초대교회 때에도 부활이 지나갔다고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부활이 지나갔다는 말이 나온 것은, 초대교회 때 임박한 종말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죽어가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거나 지나갔다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악성 종양과 같이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이 지나갔다는 자들만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는 읽을거리에서 몸의 부활을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4. 재림

 

재림은 묵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면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번개가 번쩍임 같이 동시적인 사건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재림을 성령 임함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있어서 앞에서 성령이 임함은 거듭남임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몸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보려고 합니다. 재림(再臨)을 강림(降臨)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초림(初臨)도 강림이었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강림에 대하여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강림은 여호와의 현현을 말합니다(11:5, 19:11, 11:25(주의 영이 임함도 함께). 그리고 메시아에게 임할 영의 강림에 대한 예언도 있습니다(11:2). 시편이나 선지서에서 주의 강림을 요청하고 있습니다(144:5, 64:1, 66:15). 신약에서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 가장 분명한 강림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예수님께 임함도 강림으로 말합니다(3:22). 성도에게 성령의 임함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고전15:23, 살전 1:10, 2:19, 3:13, 4:15, 16, 5:23, 살후 1:10, 2:1, 8, 5:7, 8, 벧후 3:4, 요일 2:28).

 

마태복음 24: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이주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서울의 신대방동에서 ‘from 하나님이라는 편지가 왔는데 올해 38세 된 이수민이라는 여자가 자신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대한민국의 상황으로 해석을 하는데 전두환 대통령의 7년 단임제와 김영삼 대통령의 무덤에서 봉황 알처럼 생긴 돌이 나왔는데 이것을 요단강에서 건져 올린 12돌과 연결시키면서 자신이 성령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자들에게도 넘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온갖 전쟁설과 베리칩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날짜와 징조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날은 도적같이 옵니다. 평안하다고 할 때에 갑자기 닥칩니다. 번개가 번쩍하는 모습입니다. 무슨 대단한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옛날에도 지금도 지진과 기근과 난리의 소문은 도처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메스미디어가 발달 안 되어 부분적으로만 알았지만 지금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뉴스가 나오기에 많은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의 날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 날이 언제가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론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을 믿고서 먼저 죽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부활이 있을지 염려하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대로 부활이 지나간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바로 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강림하실 때 까지 살아남아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개념보다 논리상의 순서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휴거(携擧)라는 말이 나옵니다. 잡아채서 끌어 올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보다 중요한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지만 우리 살아남은 자도 그들과 함께를 봐야합니다. 여기서 그들과 함께 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나 주님 재림 시에 살아남은 자나 간에 함께 주를 맞이할 것입니다. 여기서 공중으로 끌어올라 간다는 말은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되지 않은 자들, 곧 땅에 속한 자들이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하늘에 속한 자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땅에 속한 자로 표현합니다. 주의 재림으로 인하여 항상 주와 함께 거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바른 복음을 전하면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표가 되지만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은 구원의 표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그의 천사들과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곧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형벌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알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이 다 불에 타서 사라진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합니다. 그 생명이 있는 자들은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부터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18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1)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에녹도 주의 임하심으로 인한 심판을 예언하였고(1:14~15) 그 예언대로 노아 홍수의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사도는 주의 강림이 없다고 말한 그 시대가 물로 심판을 받은 것처럼 오늘 이 시대도 주의 강림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불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모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만 알고 믿는다면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 것입니다. 말씀을 억지로 풀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스럽게 한글성경만 연결하여 보아도 주님의 약속은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져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도 신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몸의 부활 -이장우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예수님은 있다고 하시면서 심지어 음식까지 드셨습니다(24:36~43).

 

음식을 드신 후에 이미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한 말이 이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란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 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십니다(24:44~49).

 

약속하신 것이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십니다(2:33).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1:22, 2:31,32, 4:2, 4:33, 10:41, 17:18, 17:32, 24:21, 1:4, 고전1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의 몸의 부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살아납니다. 이것을 거듭남(3:3, 벧전 1:3,23) 또는 중생(3:5)이라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가 없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언약을 따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도의 이러한 거듭남은 죽은 자가 살아났기에 부활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합니다(20:6).

 

요한계시록의 이 본문을 세대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이 역사 속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보지만 저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까지의 기간으로 봅니다. 좀 더 넓히면 창조부터 재림까지로 봐도 됩니다. 영원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제에 해당되는 이 역사 속에서도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역사 속에서 거룩한 나라로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벧전 2:9).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거듭난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였기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망이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몸의 부활을 받은 후에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5:29). 심판의 부활에 참여되는 자가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기에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첫째 사망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기에 첫째 사망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 부활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모든 자들이 다 부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복잡하여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됩니다.

 

요한복음 5:24~29절입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는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이 역사 속에서 몸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무덤에 있는 자라고 표현되는 28~29절에서 나오는 대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 모습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시는 곳이 요한복음 11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과 부활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 말씀의 뜻을 몰랐습니다.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바리새인들도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며 생명이기에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부활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또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사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과 생명이신 그의 영이 임한 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죽었다고 둘째 사망이 아니라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든 자가 예수님의 재림 시에 몸의 부활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의 부활이 둘째 사망입니다(20:11~15).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예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 살아납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를 첫째 부활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몸의 구속 곧 몸의 부활이 아니기에 이 역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는 오직 주의 영이 임한 자만이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곧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양자 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8:23).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 약속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고(8:26)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8:34). 이것은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된 자기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이 완료된 현실을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탄식하면서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3:10~14절을 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향하여 달려갑니까?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기 원한다고 합니다.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현실은 고난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달려가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노력해서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부활의 권능에 사로잡혔기에 그렇게 달려갑니다. 그 달려가는 목표와 위에서 부르심의 상이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15~21절입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이 눈물로 호소하는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침이 멸망이며 그들의 신이 배며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 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무엇이 없기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이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없기에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재림하실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이란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그 영광의 몸이며(17:1~13), 사도 요한이 본 그 영광의 몸입니다(1:9~20).

 

우리의 낮은 이 몸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켜 주실 그 날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자가 바울사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 중에 이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특정 교주가 재림한 예수라고 하면서 그들을 추종합니다. 이들은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을 부인하여야하기에 온갖 비유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집단들은 오히려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더 교묘한 것은 원어로 파자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원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본 원어를 연구를 한다는 몇 사람들의 글을 보면 부활과 재림을 자기의 주관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으로 말하기에 그 영광의 몸으로 임하실 재림은 부인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은 몸의 부활에 대한 보증입니다(고후5:1~5).

 

왜 이렇게 되는지 저도 원어를 조금 공부해 보았습니다. 신학교 때 배운 알파벳도 잊어버릴 정도의 세월이 지나서 수 십 만원을 주고 신약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책도 사고 스트롱 코드 성경도 사서 비교분석도 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알파벳의 신비라는 책(마르카 알랭 우아크냉, 살림)을 보면 고대의 문자가 어떻게 오늘날의 알파벳이 되는지 그 과정을 연구한 책입니다. 원 시나이어 문자의 형태와 뜻, 고대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에서 사용된 형태, 원래 의미, 파생된 의미, 히브리어에서 획득되고 기억된 의미들을 연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의미들을 보면 수 십 가지가 넘습니다. 이러한 문자를 해석할 때에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저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성경의 본문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단어 하나의 뜻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시작하면 그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그 단어의 용례를 살펴봅니다. 수 십 가지의 용례 중에 아주 구석에 겨우 한번 정도 나오는 뜻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 속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란 율법조문입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린다고 할 때에 이 영은 곧 새 언약을 말합니다(고후3).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성하신 새 언약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게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원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물론 한글을 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딤후3:16)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자신이 원하는 뜻들을 성경에서 찾아냅니다(벧후1:20,21).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볼 때 마다 바울사도가 기도한 것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이 일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1:15~23).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12절입니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부활이 없으면 - 신윤식 목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린도전서 15:12-19)

 

성경을 보면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다고 해도 믿음의 원리대로 살아가지를 못하고 여러 가지 분란과 의심에 사로 잡혀서 믿음의 중심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향해 사도들은 편지를 써서 권면을 하였고 사도들의 편지를 통하여 지금 우리의 현재의 삶을 조명하여 살피며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활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그릇된 사상에 미혹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부활이 없는 예수 믿음은 그 어떤 가치도 없는 헛된 것임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형편과 지금 우리의 형편을 비교해 볼 때, 일단 세상에서야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이 없다고 여기겠지만 어쨌든 정통 기독교라고 말하는 보편적인 교회들은 부활이 없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와 우리는 다른 상황에 있고, 또한 우리는 부활이 없다는 말도 하지 않고 또 그런 말에 미혹되지도 않으니 적어도 본문의 내용은 뛰어 넘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본문은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여러분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내용들이 여러분이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에 여러분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역시 부활이 없다는 말에 미혹되어 살아가는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은, 제가 여러분 강조한 대로 믿음은 말로서 증거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삶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내 입으로 말하고 고백하는 내용들이 삶에서 그대로 보이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는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삶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기에 지금의 목숨이 그들의 전부입니다. 다른 삶이 없습니다. 이생에서의 삶이 전부일 뿐입니다. 다른 것에 둘 소망도 없습니다. 이생이 소망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갑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좀 더 멋있게 편안하게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꿈꿉니다. 삶의 기회를 단 한번으로 여기기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부활이 있다고 믿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말하는 부활이 나 자신에게도 진리로 남아 있다면 부활을 믿는 자로서 다른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단순히 다시 산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의 세월이 흐르고 끝날 것이고 시간이 없는 영원의 세계에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신자에게는 세상이 좋게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부활이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동일하게 산다면 입술은 부활을 말하되 내 중심에는 부활이 없는, 즉 부활을 믿지도 아니하면서 부활을 말하여 신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확고한 근거로 증거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가 부활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보니 나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됩니다.’가 참된 부활신앙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 말하고, 16절에서도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살리는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의 근거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노라 하면서 부활이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부활을 말하는 자신 스스로 부활이 없음을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어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의 확실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헛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부활이 없고 영원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이 없다면 믿음은 분명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가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어디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소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내세를 소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삶을 뜯어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이 많이 발각될 것입니다. 부활을 말하는 나 스스로 부활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잔뜩 짊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굉장한 말이 아닐 수 없는 부활이 우리의 삶에서 전혀 힘을 나티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속 다르고 겉 다른 신앙만 잔뜩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부활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고, 또 부활이 있음을 굳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과연 부활의 소망이 나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부활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생이 전부가 아니기에 이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의 일이 뒤죽박죽되고, 자식의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려운 문제들이 나를 기다린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이생의 마지막이 있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만을 바라보면 부활이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부활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신자라고 하면서 신앙 문제보다는 세상 일로 인해서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의 부활 앞에 세워서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인가?’라는 물음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허망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죽음으로 끝날 운명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임을 보지 못한 채 다만 순간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안타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자가 소망하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가장 불쌍한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명심해야 합니다.

 

부활의 자리에 서 있으면 실패가 실패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어차피 사라질 세상 속에서의 실패는 실패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잠시 동안의 괴로움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실패의 자리로도 밀어 넣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면 실패에서 소망할 것도 바라볼 것도 없게 됩니다. 결국 끝없는 절망과 낙심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부활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자랑거리로 다가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부활이 있는 부활신앙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재림 -노요한 목사

 

주의 재림은 시공을 초월하여 일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4:29~31)

 

(1),주님의 재림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한순간에 나타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전에 올렸던 재림에 대한 글에 이장우 목사님이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의 문제라는 댓글을 올려 주셨다. 그 한마디가 재림에 대하여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일순간에 풀어지듯 그렇게 풀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말씀에서와 같이 재림의 그날은 환란의 날이요 그날 후에 즉시(동시)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인자의 징조가 나타나며 모든 족속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천사를 보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땅 사방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 그 모든 일들이 일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날에 죽은 자가 부활하는 사건과 살아있는 자들이 공중으로 끌어 올려 지는 사건도 일순간에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 (살전 4:15~17)

 

우리가 주의 재림을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도 안에 임재한 사건을 임재(파루지아)로 보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나타나는 가시적 재림을 주의 재림으로 보나 상관없이 그리고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순간에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사건까지 동시에 나타나는 초월적인 사건으로 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시간의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것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중요한 것은 시간의 문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우리에게 천년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묵시 안에선 순간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묵시의 세계엔 시간이 멈춘 곳이기에 과거가 없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하기에 거긴 언제나 오늘인 거다. 이런 이유에서 우린 천년왕국의 개념을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라 무 천년설을 더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왕으로 임하신 그때부터 마지막 심판주로 가시적 재림하시는 그 기간이 천년왕국이요. 여기서 살아나는 자들이 첫째부활이요. 여기서 살지 못한 자들은 끝나기까지 살지 못하는 것이다.(20:5), 인간에게 이 육신의 때 말고 제2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기간은 하나님 안에서 천년이요. 또한 묵시 안에서 그 기간은 한 순간이요. 인자의 날 하루이기도 한 것이다.(17:22)

 

(3),죽은 자의 시간적인 공백기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그 마지막 날에 주께서 그들을 무덤에서 부활시켜 데리고 오신다고 했는데 그동안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걸 잘못 해석하여 성도에게도 중간지대가 있다느니 그래서 어떤 목사는 사도행전의 음부를 그 곳으로 해석하여 공격을 받기도 한 대목이다. 이 문제는 저에게도 오랫동안의 해결되지 않았던 딜레마였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의 문제가 해결되니 자연스럽게 해결되더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 앞서지 못한다 하지 않던가? (살전4:15-16)"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미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동시에 일순간에 나타나는 재림 사건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인식되게 될 것이다. 모든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백일하에 만 천하에 드러나고 마는 지상 최대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 안에 있으면 이 육체의 죽음이 우리를 주님과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일 뿐이다. 그래서 이천년 전에 죽은 자나 지금 살아있는 자나 재림의 날은 시간 공백이 없는 한 날 한시 순식간의 사건으로 모두에게 동시에 인식되는 것이다.

 

제가 몇 년 전에 전신마취로 고관절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수술 시간이 한 3~4시간 걸렸었는데 깨어나 보니 그 마취 되었던 시간은 아예 내 의식 속에서 삭제된 것처럼 수술 전과 후는 시간 공백이 없이 찰나로 연결 지어지더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 개념은 마치 이와 같은 거라는 거다.

 

(4),역사 안에서 죽은 자를 찾으러 오시는 것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일지니라"(24:28)'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심판받는 자들에게 적용하는데 인자가 임할 때 이런 일들이 나타난다고 하셨죠.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겠나? 예수께서는 살았다하는 자들을 구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나 죽은 자임을 아는 자가 성도라 하지 않았는가? 건강한 자들에겐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나 의원이 쓸데 있다고 하신 것이다.(9:11),그래서 주검이 있는 그곳에 여지없이 독수리가 그 먹잇감을 찾듯 성도를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음성은 죽은 자에게만 들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25), 이 역사 안에서 살았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자들은 산 자 같으나 죽은 자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5),그날은 성령이 임하는 날이요 심판의 날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요엘2:28~32), 이 모든 예언이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취되지 않았던가?(사도행전2) 하나님이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저들이 이상을 보고 진리를 보게되는 것과 하늘과 땅에 이적이 나타나고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나타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은 주의 재림의 날이요. 이 모든 것은 동시에 나타난다는 사건인 것이다.

 

(6),그날에 가시적 재림을 목격하고 통곡하는 자들은 이미 늦었다는 거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4:19-20), 그러니까 여기 안식일이나 환란의 겨울철에 임박하여 도망하는 자들과 아이 밴 자들, 젖 먹이는 자들을 같이 취급하고 있다. 아이를 배었다는 것은 아직 생명으로 잉태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를 낳아야 진짜 여자다. 여자라고 다 여자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여자가 그리스도를 낳는다고 하지 않던가? (12:1~2) 그 때 나는 쇠하여지고 예수가 생명으로 드러나야 한다. 내가 산 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하늘 생명은 성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정되고 예수가 진짜 생명이란 자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죽은 자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며, 내가 산 자처럼 너풀거리면 그는 독수리처럼 주검을 찾고 있는 주님의 눈에 발각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직 생명으로 낳지 않았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요. 계속 남에게 의존하여 말씀을 받아야 하는 율법적인 신앙이다. 그 안에 생명 되는 진리의 양식이 아니라 율법의 젖을 먹이기에 바쁜 율법주의 행위주의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그 재림의 심판 날에 도망치려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 안에 아직 안식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시편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오늘날 세대주의자들이 아직도 지상에 존재하는 피신처를 찾고 있다면 겨울철에 그리고 안식일에 도망치려는 자들인 것이요 이들은 결단코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7),데려감을 입는 것은 그분의 작정에 의한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24:40-41) 저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데려감을 입는 것은 저들이 어디에 속해 있느냐 그거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는 언약 안에 있었기 때문에 데려감을 입게 된 것이요. 또 두 사람이 같이 매를 갈고 있지만 즉 어떤 일을 열심히 한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데려감을 입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원하시는 분의 선택에 따라 하나는 데려감을 입게 되고 하나는 버려둠을 입게 되는 것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작정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다.

 

(8),주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 밖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미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힘도 그러하리라"(24:26~27)예수의 재림은 이 우주적인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임하셔야 한다. 그래야 이미 예수 안에 죽어 있는 자들이나 산 자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이 지구상 어느 장소에 거하든지 그거에 제한 없이 심판의 주님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제한적으로 주어 졌던 이 지구란 공간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불태워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가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9),천지가 불타 없어짐으로 그 나라가 완성되게 되어 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4:35)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확실하다는 것을 천지가 없어지는 것으로 말씀 하신다. 즉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 일획 일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 말씀하셨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이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8) 여기선 말씀의 완성으로 천지가 없어지는 것으로 보증하시는 거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루시고 천지를 불태워 없애 버리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말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8~13)

 

이렇게 우리는 이미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들이며 그 안에서 새 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는 복된 자들이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일순간에 나타날 주님의 재림 사건으로 이 역사는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잠시 잠깐의 고난을 이기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며...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