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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1~6 행복하십니까? 2019. 4. 10

 

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5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6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지난 한 주간 만족하셨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많으면 만족할 것 같아서 많은 돈을 모아서 풍요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배만 부르면 다른 소원을 없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배부르고 나니 다른 욕망이 또 생기는 것입니다. 먹음직한 것에서 보암직한 것으로 나가고 결국은 세상의 자랑거리로 나가는 것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생살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만족이라든가 행복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제가 결혼주례 할 때에 신랑 신부에게 왜 결혼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에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밖에 모른다고 말해줍니다. 또는 행복하려고 결혼한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결혼하면 이제부터 불행만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행복하려고 하는데 남편이나 아내가 내 행복을 채워주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사랑이나 행복이니 하는 말들도 타락한 인간들이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하기에 그런 단어도 다 성경으로 재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본문 1절을 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불행한 일을 다른 번역을 보면 억울한 일이라고 합니다. 히브어로 보면 고질적인 악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견디기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나를 화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드는 것들이 매일 뉴스로도 쏟아집니다. 동일한 뉴스에 어떤 사람은 환호하고 어떤 사람은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런 뉴스도 가짜가 많아서 뉴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하는 페이크라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월요일 광주에서 심야버스 타고 오는 중에 처음 본 프로그램입니다. 이슈가 되는 뉴스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짜행복에 속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 2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부와 재산과 명예를 원하는 대로 다 주시면서도, 그것들을 그 사람이 즐기지 못하게 하시고, 엉뚱한 사람이 즐기게 하시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요, 통탄할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일이 왜 통탄할 일이 됩니까? 그 이유는 이런 것을 주시지 마시든지 주셨다면 누리게 하시든지 하셔야지 왜 누리지 못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전도서 5:19절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요를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2절에서는 이런 것을 다 주셨다면 누리게 하셔야 선물이 되는데 주었다가 빼앗아가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은 참으로 해석이 안 된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구약성경에서 자녀가 많고 장수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하여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안장되지 못하면 낙태된 자가 그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복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번영 또는 재산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많고 장수를 하고 재산도 많은데 그 재산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으로 만족을 못하다가 죽는데 죽고서는 어떻게 된 셈인지 제대로 안장(安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안장되지 못하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태에서 죽어서 나온 아이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 이유를 봅니다.

 

4~6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태어날 때에 죽어서 나온 아이는, 뜻 없이 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그 속에서 영영 잊혀진다.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 사람보다 더 편하게 안식을 누리지 않는가! 비록 사람이 천 년씩 두 번을 산다고 해도, 자기 재산으로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하면 별 수 없다. 마침내는 둘 다 같은 곳으로 가지 않는가!”

 

자녀가 많고 장수하고 재산도 많지만 그것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다가 죽어서 제대로 안장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태에서 죽어나온 아이가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둘 다 같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결론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자녀와 장수와 번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어서 태어났다면 인생의 불행들을 보지 않고 죽었으니 그것이 나은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천년의 두 배를 살아도 태에서 죽어난 아이와 죽음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생하지 않고 죽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인간의 허무를 극한까지 몰아붙여 참된 지혜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전도서의 이런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이런 꼴을 보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왜 나를 낳으셨냐고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이런 꼴을 보고 살 정도로 악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기가 힘들다. 죽고 싶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나는 이렇게 불행하게 살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나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절대 진리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의 행복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인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작은 행복이라도 누리자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무엇이 행복입니까?

 

오늘 본문의 3절과 6절의 행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은 창세기 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타락한 우리가 정의내린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야 그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이 빛을 보고 행복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어두운 것과 썩어질 것들을 많이 가지면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가짜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있을 때에 성경은 죄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홍수의 심판이 있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24:37~39).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조차 세상의 번영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서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참된 복은 아닌 것임을 전도서가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아래 모든 것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을 솔로몬은 다 가져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많아진다고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전도자는 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로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보다 두 배로 산다고 하여도 죽음으로 끝나기에 세상의 것으로는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 아닙니다. 인간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 부활합니다(:5:29,24:15).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이 생명이 아닌 것을 복이라고 속이는 것이 이 세상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해 아래 일어나는 인생들을 보면서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미리 말함으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도 미리 말합니다.

 

신명기 10:12~13절입니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이렇습니다. 이 말씀을 받는 일차적인 대상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야여정동안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출애굽 2세대들과 다시 언약을 체결합니다. 여호와의 요구를 온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 너희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행복도 토브입니다. 구약에서 복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로 나오지만 오늘 본문과 신명기의 이런 행복이라는 말씀이 토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신명기 30:15~16절입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복(토브), 사망과 화를 앞에 두고 명령하십니다.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생존과 번성입니다. 이것을 바라크라고 합니다. 창조물들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 것이 바라크입니다. 그러므로 토브로 인한 바라크가 행복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생육과 번성을 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이어지는 17~20절입니다.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1)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19절의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에서 복은 바라크입니다. 그러므로 생육과 번성과 장수를 얻으려면 생명을 택하라고 합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생육과 번성은 죄악만 관영한 결과임을 이미 창세기 6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전도서 본문과 창세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연결하여 보면 사람의 자손이 백 명이나 되고, 번성하고,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생명에서 끊어진 것은 차라리 태어서 죽어서 나온 아이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타락한 우리들은 생명에 대한 복은 보지지 않고 썩어서 없어질 것들만 보고서 복과 저주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직접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선택하면서 살아갑니까? 생명과 복을 택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망과 저주를 택하였습니다. 사망과 저주를 택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 생존과 번성입니다. 이것은 바알과 아세라가 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보기에 좋은 풍요와 다산을 택하였기에 이들은 약속의 땅에서 늘 적들에게 침략을 받고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망과 저주를 택하줄 모르고 이런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신명기 30:1~4절입니다. 봉독 1절에서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란 신명기 28~29장의 언약의 복과 저주입니다. 언약의 저주가 임할 때에 기억하라고 합니다. 언약의 저주가 임하면 나라가 망하기에 여기서 말하는 복은 바라크입니다. 생육과 번성이 없이 기근과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 사망과 저주를 택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기억하고 돌이키면 하늘가에 흩어져 있어도 모아들이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5~10절입니다. 봉독 스스로 돌이킬 수 없기에 여호와께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할례는 새 언약입니다.

 

이어지는 11~14절입니다.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주시면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에 올라가서 우리에게로 가져와서 들려달라고 하지 않을 때가 마음의 할례가 일어날 때를 말합니다. 바다 밖에서 가져오라고 하지 않아도 그 말씀이 가까이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게 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으로 이루실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생육과 번성과 장수의 복이 아니라 생명의 복을 받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참된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어지는 5~8절입니다.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모세가 기록한 내용의 성취가 복음이라고 합니다.

 

9~15절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1)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참된 복, 인생의 참된 행복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이런 복이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온갖 비난을 받아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다면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런 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이 볼 때는 저주와 같아 보이는 온갖 질병과 고통과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생명을 받았기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왜 그런 저주를 받았느냐고 할 정도로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있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다윗이 받은 복은 목동이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잉태하여 간음하고 살인한 죄인이 일한 것도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110:1, 22:43,44). 이 복으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