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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7~12 채울 수 없는 갈망 2019. 4. 17

 

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9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10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1)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이주 동안 만족과 행복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고서 만족하게 살려고 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고 누림이 우리의 참된 만족과 참된 행복임을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서도 일상에서의 삶은 만족과 행복보다는 여전히 불만과 불행이 가득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봅니다. 사람이 수고하는 것은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오늘 뉴스에 며칠을 굶은 사람이 지나가는 여인의 가방을 낚아채서 도망가다가 잡혔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자족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하여 음식을 먹어도 그 입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입의 문제가 아니라 배의 문제입니다. 그 많은 음식을 소화시키고 또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 배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세포가 약 60조개라고 합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가 다 생명단위이기에 에너지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완전히 죽기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식욕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의 식욕이 네페쉬입니다. ‘네페쉬는 전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식욕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갈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페쉬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뜻이 갈망하는 인간입니다. 창세기 3장 의 타락 이후로 인간의 네페쉬는 생명이 아니라 생존의 갈망이 가득합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사람이 수고하는 것은 잘 먹자고 하는 것 아닌가? 그뿐이랴?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 입이 있고 네페쉬라는 욕망이 있으니 식욕으로 번역을 하였지만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이 입을 위한 것뿐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입이 만족하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고하는 것이 배고픈 시절에는 배만 채워지면 되지만 배가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결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 8절입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새 번역으로 봅니다. 슬기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이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위하여 평생을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기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전도서는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은 지혜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가 이것이 바른 삶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마음으로 공상하는 것을 잡기 위하여 헛되이 애를 쓰는 것보다 작은 것이지만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 낫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새 번역입니다. 이것 또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

 

마음의 상상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마음의 상상이나 공상이라는 것은 욕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최고로 큰 교회라고 하는 곳의 목사는 마음의 상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을 구체화시켜서 말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차원 영성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이 얼마나 인간의 탐식을 불러 일으켰는지 한국 교회 거의 다 이 말에 오염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내용인데 이 말씀을 인간의 탐심을 부추기는 말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심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로 포장한 것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10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지금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오래 전에 생긴 것이다. 인생이 무엇이라는 것도 이미 알려진 것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강한 이와 다툴 수 없다.” 공동번역입니다. 이미 결정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그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보다 강한 어른에게 왜 이러느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있는 것들이 이전에 이미 있었고 알려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어떠함을 이전에도 이미 알려졌고 지금도 알려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자기보다 더 크신 분에게 따질 수 없는 노릇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크신 분이란 인생을 지으신 분입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당신이 무엇을 만들었느냐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지혜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어떤 그릇을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의 뜻입니다(29:16, 9:21).

 

제가 아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동창 중에 카스에 이런 글을 써두었답니다. ‘공평한 하늘아래 하찮은 배역은 없다이 글을 쓴 사람은 상당히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스카이 출신이지만 그 당시에 힘든 일을 하는 것을 동기들이 보아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모든 동창들 중에서 가장 어렵지만 단 한 번도 자기의 어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전해준 사람이 자신이 성경을 읽어보니 많은 사람들 중에 이 한 사람이 자족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크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자신이 어떤 배역이든지 그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1)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일들이라는 각주를 보면 언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들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바르의 복수인 드바림입니다. 이 단어는 말, , 계명, 규례, 뜻 등으로 넓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헛된 일들과 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들을 각주에서 언론이라고 하였으니 세상에 쏟아지는 뉴스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즈음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 국민이 자기의 방송을 한다고 봐도 됩니다. 그런 말과 일들이 다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단 한명의 생명도 살릴 수 없는 헛된 뉴스들이 남발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굿 뉴스를 전합니까?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말이 많으면 빈 말이 많아진다. 많은 말이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가?” 많은 말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말을 많이 할수록 그만큼 헛수고를 하는 것이라, 아무 소용이 없다.” 설교도 말로 합니다. 한 교회에서 20년을 설교했으니 어지간히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여러분에서 도움을 줄 수 없는 헛수고임을 실감하면서 살아갑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목사가 대단한 사명을 가지고 나는 바른 복음을 전한다는 그런 소리조차 자기의 말이라면 아무른 도움이 안 되는 헛소리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10~13절입니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 교회에 파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여기서 우리 주라고 합니다. 나와 너희와 그들의 주가 아니라 우리의 주라고 합니다. 즉 같은 주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안에 파당이 생겼기에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또 목사나 교회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용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포장하여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반대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로 봅니다. 그러나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은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이 모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지금도 이루고 계심만이 헛말이 아닙니다.

 

본문 12절 새 번역입니다.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누가 그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공동번역입니다.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에게 무엇이 좋을 일인지 누가 알겠는가? 죽은 다음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누가 알려 주겠는가?” 그림자,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살이라고 합니다.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알겠느냐고 합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누가 그에게 말해 주겠습니까?

 

어제 입관을 하였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이 울어도 감은 눈, 감은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토요일까지만 해도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일부터 사람을 못 알아본 것입니다. 월요일 밤에 돌아가셨습니다. 화요일 입관을 하는데 누가 그분에게 세상의 일들을 알려주겠습니까? 한 평생을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것들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지금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은혜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채울 수 없는 갈망입니다. 채울 수 없는 식욕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식욕만 채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모든 갈망들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네페쉬라고 할 때에 갈망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인정받고 싶은 욕망, 성취하고 싶은 욕망, 지배하고 싶은 욕망, 칭찬받고 싶은 욕망, 그 외에도 무수한 욕망들을 채우기 위하여 불나방이 불을 향하여 달려들듯이 욕망으로 달려가는 인생들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생존의 충족만을 위하여 달려가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림자에 실체가 오시지 않으면 헛된 그림자로 살다가 끝이 납니다.

 

시편 39:4~7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인생의 헛됨을 모르는 자들은 헛된 일로 소란하고 분주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요란함이 재물을 쌓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재물을 쌓아서 든든하다고 하는 그 때도 진실로 허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헛됨을 아는 자들은 소망을 주님께 둡니다. 자신의 종말과 자신의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여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헛된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는 자는 주님이 소망이 아닌 자들입니다. 우리도 다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어떻게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까?

 

시편 102:11~14절입니다. “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그림자와 풀의 시듦과 영원함을 대비합니다. 그 영원한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면 시온의 티끌도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땅의 티끌과 같은 자들이 주의 은혜를 받게 되면 헛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사모합니다.

 

누가복음 2:25~32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의 찬양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을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품에 안으면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우리조차 그 아기로 오신 분이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면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허무한 그림자와 같은 인생살이 속에 이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