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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3:1~8 찾을 때와 잃을 때 2019. 1. 2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오늘이 201912일 새해 첫 설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1:9). 그러므로 날짜의 바뀜이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동안 때에 대하여 살펴본 제목만 보면 날 때와 죽을 때, 울 때와 웃을 때, 버릴 때와 거둘 때, 안을 때와 안는 일을 멀리할 때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지킬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잠잠할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에 대하여 간략하게 보고 찾을 때와 잃을 때에 대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 후반부에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살이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간직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연말에 주소록 정리하면서 뺄 자를 뺍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송구영신(送舊迎新)을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맞이할 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켜야할 것은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은 지키려고 합니다.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지켜야 할 텐데 오히려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버리고 생명도 아니고 썩을 것들을 지킨다고 송구영신을 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지킴과 버림입니까?

 

7절 전반부입니다. 옷을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싸워서 찢어질 때가 있고 화해하여 관계가 회복될 때도 있습니다. 이 말씀도 세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호세아서 6:1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에 징계를 하시는 것은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면 찢으셨지만 도로 낫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대로 주님께서 안는 일을 멀리함으로 마치 버림받은 것과 같게 하셔서 주께로 돌아와 주님을 끌어안게 하시듯이 주님께서 찢고 치신 것은 돌아오게 하셔서 고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7절 후반부입니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잠해야 할 때에는 말하고 말해야 할 때에는 침묵합니다. 이것이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여도 말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는데 말해서 불리하겠다고 여기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하지 않고 잠잠해야 하는데 그 입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여 말하게 됨으로 온갖 요란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3장에서 혀의 악함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쉬지 않는 독이며 지옥의 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불사르게 하는 것이 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침묵할 때와 말할 때를 구별하지 못하기에 늘 소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3:31~33절입니다.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3)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일은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일입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빌라도가 재판할 때에 진리에 대하여 묻자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빌라도에게 진리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하여도 예수님은 변론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27:14). 예수님께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십자가로 가신 것은 이사야 53:7절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그러므로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시고 이루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8절 전반부입니다. 사람들도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는 진리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를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가치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합니다. 로마서 9장을 보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반발하면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반발이 나오는 것 자체가 자신은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도 주님의 일입니다.

 

8절 후반부입니다.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도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전쟁과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 전쟁을 선포합니까? 개인이나 단체가 전쟁을 선포할 때에는 나에게 심각한 피해가 주어진다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보다 평화가 더 이익일 때에는 평화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 북한의 위원장이 전쟁을 말하지 않고 경제와 평화를 말하는 것은 전쟁보다 평화가 그들의 이익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때를 말해도 자기 이익중심의 때를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도 자신이 신앙생활 잘 하고 있을 때에 임하도록 하려고 알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모든 때조차 나를 중심으로 결정하려고 하는 죄인임을 보게 됩니다.

 

6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난후에 부끄럽고 두려워서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숨어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찾으시는 것은 이미 잃어버리셨기 때문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리지 않으셨다면 찾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잘못해서 잃어버린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느냐고 하면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하는 이 생각 자체가 이미 타락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이러한 창세기의 말씀들도 잃은 자를 찾아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읽어버린 자를 찾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목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목자들이 돌보아야할 양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지 않는 모습을 에스겔 선지자는 책망하면서 새로운 목자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에스겔 34:1~6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잃어버린 양 떼를 찾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합니다.

 

이어지는 7~16절입니다. “봉독 에스겔 선지자는 다른 유다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것을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양들 사이에서도 강한 양이 약한 양을 괴롭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잃은 양을 찾으시는데 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그 목자가 다윗이라고 합니다(23). 다윗은 이미 죽은 왕인데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다윗에게 허락한 그 언약, 영원한 왕위를 주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시고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심으로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오셨다고 하시지만 이스라엘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이방인 여자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이방인 여자의 간구를 들어주시면서 네 믿음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도 주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고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8:10).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분이 예수님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인하여 이방인도 찾아내시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어버린 자를 찾는 말씀을 세 가지의 비유로 말씀합니다. 양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시는 것과, 드라크마 열개 중에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것과, 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는다는 구약의 말씀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두 아들 비유에서 타락한 아들이 돌아올 때에 환영하는 아버지가 못 마땅하여 큰 아들을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입니다. 자기들의 의가 있기에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9:9~10절입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도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또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삭개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삭개오의 집에 가심으로 삭개오가 받은 은혜로 나온 것이지 그 조건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자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 속하여 모두가 선악과를 따 먹고 태어난 자들이라서 모두가 자기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다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찾아서 생명을 주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방인들도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찾으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빌립보서 3:7~9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오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울을 만나주십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 암아 얻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잃었다가 주님의 십자가로 찾아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나누어주심으로 그들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심으로 찾아내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찾아내어 진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버리며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배우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