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에스겔 48:30~35 열두 문 2013. 2. 20

 

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 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 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지난주에 성도의 기업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동등한 권리로 기업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계시를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제대로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사후에 북 이스라엘이 10지파 남 유다가 2지파로 나누어집니다. 레위지파는 각 지파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남북 분단 후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고 앗수르의 통혼정책으로 피가 섞여 버립니다. 그러므로 남 유다 사람들은 북쪽의 10지파를 유대인으로 인정을 하지 않기에 사마리아를 이방인처럼 개처럼 여깁니다.

 

그러면 남 유다는 더 나은 면이 있습니까? 남 유다도 BC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지만 이미 다른 나라에 잡혀가서 돌아온 자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와 레위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레위인들은 족보가 없어서 레위지파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림과 둠밈으로 판결하기 까지는 제사장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도 하였습니다(느헤미야 7:61~63).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은 주로 유다지파가 중심입니다. 그리고 레위인과 베냐민 일부입니다. 물론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은 자들도 일부 있었습니다만 12지파의 온전한 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본 이상으로는 12지파가 다 온전하게 기업을 받는 것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기 백성의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12지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 12지파가 받은 기업의 중심에 있는 성읍의 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성읍이 있는 곳은 성소를 중심으로 위쪽에는 레위인의 구역과 아래쪽에는 성읍이 있습니다. 이 성읍에는 누구나 와서 살 수 있는 성읍입니다. 에스겔 48:19절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그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그 땅을 경작할지니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그 성읍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이 성읍의 규모는 중앙에 특별히 구별한 가로 세로 2만 5천척 중에 성읍이 있는 자리이며 이곳에 가로 세로 4천 5백 척의 성읍입니다. 이런 길이를 지금의 미터로 환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환산을 하면 성경이 처음에 말하고자 한 그 수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로 돌아와서 12지파가 동등한 권리로 동등한 성읍에서 동등한 하나의 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혈육인 야곱의 12아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심으로 그들의 혈통적인 기득권을 부정합니다(마3:9).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더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여기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에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요8:44).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죄인으로 보는 삭개오 에게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으며 또한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눅19:9).

 

갈라디아서 3:1~14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율법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있음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도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는 오직 은혜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에베소서에서 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새사람을 지어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성전입니다.

 

갈라디아서 3:23~29절을 봅니다. “봉독”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들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들입니다. 이들이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에스겔서의 12문이 보여줍니다.

 

에스겔 48:30~35절입니다. “봉독” 그 성읍의 출입구를 말합니다.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며 그곳에 성읍의 출입문이 있는데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북쪽으로부터 르우벤, 유다, 레위이며 동쪽은 요셉, 베냐민, 단이며 남쪽은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이며 서쪽은 갓, 아셀, 납달리입니다. 여기서는 요셉이 하나의 지파로 되고 레위가 한 문을 차지함으로 12지파가 다 동등한 그 성읍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12지파의 이름으로 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어떤 차별이 없이 온전하고 완벽하게 구원하여 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런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신약에서는 14만4천을 말할 때와 요한 계시록의 12문의 이름 외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지파가 6지파나 됩니다. 6지파 중에 2지파는 지명으로 언급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단지 혈통적인 12지파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혈통적인 12지파를 택하셨다면 12명의 제자들도 각 지파에서 한 명씩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2명의 제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숫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계시록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1~8절을 봅니다. “봉독”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에서 새로운 땅과 새로운 성전을 본 것처럼 사도 요한은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새 예루살렘은 성읍이나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단락에서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보려고 하는 것은 3절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7절에서 아들입니다. 에스겔이 그림자로 본 성읍의 12문과 여호와 삼마에 관한 내용의 완성이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9~10절입니다. “봉독” 9절을 보시면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어린 양의 아내가 건물로 된 성읍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아내라면 교회이며 성도이기에 결코 성읍일 수는 없습니다. 10절에서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에스겔이 본 장면과 비슷합니다.

 

에스겔 40:1~2절입니다.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에서 여호와의 권능에 의하여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매우 높은 산에서 남쪽의 성읍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 성읍을 보여주면서 시작되는 새 땅과 새 성전에 대한 내용이 에스겔 40장에서 48장까지의 내용이며 그 결론은 여호와 삼마입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본 환상과 사도 요한이 보는 계시록의 이 성읍의 중간에 무엇이 들어있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주일 낮에 에베소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을 다 구속하여 내시면 성전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봉독” 주일 낮에 에베소서 설교를 통하여 자세하게 말씀드린 본문이라서 기억이 날 것입니다. 유대인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허시고 이 둘을 그의 피로 한 새사람을 만들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시는데 이들이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의 모퉁잇돌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이 과정이 성도에게는 고난이며 환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환난이란 나를 깨고 부수시기 위하여 원수 같은 사람과 부부도 되고, 이웃도 되고, 구역원도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드셔서 성전이 완성이 되면 그것이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의 완성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1~14절입니다.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어린 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다고 합니다. 성도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자들입니다. 이 질그릇이 깨어지고 새로운 몸을 입을 때에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라는 보배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읍의 문이 12문입니다. 이 문들이 12지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문들의 기초석이 있는데 이 기초석의 이름들은 어린 양의 12사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방금 본 에베소서의 말씀 중에 2: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이 부분을 말씀드릴 때에 선지자들을 문법적으로 따져서 신약의 선지자들로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구약의 선지자도 포함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이 만들어지기 위하여 기초석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보다 사도들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시간과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묵시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사도가 기초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기초석이 12가지의 보석입니다. 제사장의 흉패에 12가지 보석이 달리듯이 예수 그리스께서 자기 신부들을 보석과 같이 단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읍은 어린 양의 신부이기에 그 성읍 안에 성전이 없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나타난 성전이 여기서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21:22절입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이곳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는 곳임을 2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2문의 기초석과 문들이란 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워지는 것들이기에 이 문들은 곧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이 됩니다.

 

요한복음 10:7~10절입니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만이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며 강도라고 합니다. 오직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만이 양들의 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으로 들어온 자들은 무엇을 찾게 됩니까?

 

골로새서 3:1~17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위엣 것을 찾게 됩니다. 이들은 서로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기에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일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 역사 속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이 땅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죄와 더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할수록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