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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4:9~11 내 누이, 내 신부야! 2020. 2. 12    (269장)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성경에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 예로 말씀하십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그 열두 아들로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십니다. 만들어 내시는 배경은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서,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4백년을 지나면서 한 민족이 되게 하시고, 이들을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시키시면서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관계성을 하나님은 왕과 백성,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양과 목자, 포도나무와 가지 등으로 말씀합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남녀의 노래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보려고 하는 내용은 신랑이 신부를 내 누이, 내 신부라고 부릅니다. 어떤 주석은 이 당시의 문화에서 신부를 자신의 누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친밀함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우리의 문화에서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라는 말도 합니다. 이 말은 혈육은 싸워도 남이 될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혈육의 관계라도 하나가 되지 못함을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조선시대 왕이 있을 때에는 왕자의 난들이 일어났습니다. 재벌가는 지분 싸움으로 혈육이 싸웁니다. 이런 세상의 가치관으로 누이나 신부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의미를 찾아봐야 합니다.

 

본문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 번 때문에, 목에 걸린 구슬 목걸이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달콤한 그대의 사랑,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한다.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기름이 어디 있느냐! 11 나의 신부야, 그대의 입술에서는 꿀이 흘러나오고,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고여 있다. 그대의 옷자락에서 풍기는 향내는 레바논의 향기와 같다.”

 

신랑이 신부를 보고 이렇게 즐거운 것은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다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면 신부가 무엇으로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왕입니다. 술람미는 가난하고 검은 여인입니다. 왕의 신부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신부로 결혼식장에 나가려면 전적으로 신랑이 준 것만 입고 나가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되는 신부들이 입은 것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니 자신이 무언가 의로운 행위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입는 것은 부정하며 더러운 옷입니다(64:6). 그러므로 오직 그분이 주신 의로만 단장해야 합니다. 백퍼센트 주신 것으로만 단장한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아오는 신부를 흠 없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3~17절입니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 가운데 마지막 복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이 복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이 복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받는 복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란 자신이 만들어 입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의 세마포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 들어가는 자들은 자기를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성에 들어가려고 하니 무언가 미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의 옷에 자기의 공로를 덕지덕지 덧붙이려고 합니다. 선악과 따 먹은 인간의 거래하는 마음이 있기에 이런 말들에 잘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속이는 자들을 향하여 성경은 개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개들이라고 한 자는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자들을 향하여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를 삼가라고 하였습니다(3:2). 그러므로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자들이 다 예수님의 의의 옷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자기들의 의를 훈장처럼 붙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북한의 장군들 옷에 온갖 훈장이 가득한 것처럼 그런 것들을 붙이고 가면 신랑이 기뻐할 줄 아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오래전에 꽃씨를 나누어준 임금 이야기를 했습니다. 임금이 어느 마을을 갈 텐데 꽃을 피운 화분을 들고 맞이하라고 하면서 미리 꽃씨를 나누어준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임금이 왔을 때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화려한 꽃을 피운 화분을 들고 맞이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빈 화분을 들고 임금을 맞이한 것입니다. 임금이 그 사람에게 가서 왜 너는 꽃이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님이 주신 꽃씨를 정성껏 심고 물도 주고 햇볕도 비추었지만 아무리 해도 싹이 나지 않았기에 그대로 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임금님은 내가 원한 사람은 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정직한 자를 찾기 위하여 삶은 꽃씨를 나누어주었는데도 다들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 다른 씨를 심어 온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3절을 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예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입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마지막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복이란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만 입고 나오는 자를 흠이 없이 아름답다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기의 더러운 행위로 온갖 것으로 꾸미고 나오는 것을 개들, 점술가, 음행, 살인, 우상숭배,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 밖에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성령과 신부된 교회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고 하는데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메가, 마지막, 마침의 복이라면 알파, 처음, 시작의 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20~25절입니다.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신부된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값 주고 산 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라고 합니다. 계시록과 창세기의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으니 원래는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내 뼈 중에 뼈이며 살 중에 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끌려 나오는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장식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자기 공로로 치장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으로만 단장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쌓아서 남들과 차별되는 땅의 복이나 하늘의 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한 것입니다. 이 성에 들어가는 자들이 요한 계시록 22장의 복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을 다른 것으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빠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데(16:9),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이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자꾸만 사람의 혈육으로 만든 것들을 덧붙이려고 하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봉독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합니다. 흠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눈이 나의 신부라고 합니다. 이것은 혈육의 관계나 부부의 관계를 초월하여 하나 됨을 말씀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온전히 비워 죄인인 우리를 그 안에 품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됨으로 불러내시기에 자기의 신부를 자기의 누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나온 자들을 향하여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는지 조금도 흠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보기에 좋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히브리서 2:8~9절입니다.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 계시의 말씀을 눈에 보듯이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위하여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온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온전하게 된 자들은 한 근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심으로 그 예수님을 받은 자들은 한 근원에서 나왔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맏아들의 희생으로 우리를 양자 삼아 주셔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선포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2~18절입니다.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우리가 혈과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혈과 육은 영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평생토록 죽음의 종노릇하면서 살다가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입고 오신 것은 이러한 자들을 놓아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죄인의 모습으로 보내시고 그에게 죄를 정하신 것은 그 희생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 됨의 관계는 성령 안에서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신비 속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25~33절입니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창세기 2장에서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원이 한 몸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향하여 내 뼈 중에 뼈이며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나니 서로 다른 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길은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들을 위하여 희생하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 외에 다른 것을 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예수님의 피 공로 외에 다른 것을 덧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신부를 신랑은 아름답게 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