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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4~10 당당한 여자 2020. 3. 25       (413장)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1)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지난주에는 신랑을 잠시 놓쳐버린 신부가 신랑을 다시 찾은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찾아 나섰는데 그 신랑이 자기 안에 있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17:21).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신 내용인데 왜 제자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 제자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 사람이라도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모이면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이라고 하고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두 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룹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하신 일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7:4). 주님의 떡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겁니다(고전10:16).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고전12:27). 이러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서로 봉사를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4: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은사로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은 자기 생리에 맞지 않기에 결국은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 하나 하나를 오늘 본문처럼 나의 완전한 자는 오직 너 하나뿐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곳 그리스도의 하나 된 신부를 말합니다.

 

개인구원이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냐는 내용을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개인주의가 그것도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씨족공동체가 많았습니다. 씨족이 아니라도 마을 공동체로 살아왔습니다. 울력, 두레, 향약이라는 단어들은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도시화는 온갖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조류는 이 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대안적인 취미 단체들이 등장합니다. 더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놀이단체는 온갖 악한 일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가 부인되고, 자아가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됨을 소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먼저 봅니다. 봉독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하여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왕비가 예순 명이며 후궁이 여든 명이며 궁녀도 수 없이 많지만 나의 비둘기, 완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의 노년에는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고 합니다(왕상11:3). 우리는 이런 솔로몬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솔로몬을 통하여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까? 참된 사랑은 정략결혼으로도 나올 수가 없고,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여인에게서도 나올 수가 없고, 성 밖에서 버림 받아 마땅한 자에게 참된 사랑이 나타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솔로몬 곁에 일천 명의 여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다 성안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시녀라도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 술람미 보다는 나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상처 입고 겉옷을 빼앗긴 채로 자기가 사랑하는 임을 찾아 나섰다고 하니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이 네가 사랑하는 자가 남이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그때 술람미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말합니다. 점도 흠도 없이 완벽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이주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완벽한 신랑의 완벽한 사랑을 받은 자 역시 점이나 주름 잡힌 것이나 티가 없는 완벽한 신부입니다(5:27).

 

그런데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여인들은 자기들의 잘 남이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것을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왕궁의 시녀조차 무시할 그런 여인이 술람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을 향하여 왕인 솔로몬이 나의 완전한 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도 이 사랑을 받고 계신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비록 보잘 것 없는 남편이라도 아내가 나는 당신 밖에 없다고 한다면 남편은 당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정말 보잘 것 없어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자녀는 당당할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당당함이 있습니까? 윤리 도덕적인 자격으로 갖추든지, 율법의 의로 갖추든지,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자기의 행위로 당당하게 갖추어 입는 다고 하면 성경은 그런 옷을 더러운 옷이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두렵고 부끄러워서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 옷을 입히려면 짐승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지 않고 자기 스스로 멋있는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하는 역사가 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역사입니다. 이런 바벨탑에서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흩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부릅니다.

 

문명의 발상지가 되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을 부르신 그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람과 바로 왕을 대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세상의 영광을 가진 자입니까? 아브람은 바로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의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썩지 않을 생명을 주시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위하여 출애굽 시키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의 죄를 알고 대신 희생할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심인데 오히려 율법으로 치장을 합니다.

 

이사야 59:1~8절입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사야 64:6절입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입고 나가는 옷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못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두 곳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말씀은 이미 창세기 6장과 8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죄가 자기 죄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술람미를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의 왕은 이런 술람미를 향하여 너 만이 나의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3)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있었던 예루살렘을 아라비아아의 시내 산이라고 합니다. 즉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은 그 당시에도 땅에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감히 이방인인 주제에 할례도 받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율법주의에서 못 벗어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 하갈의 자녀 이스마엘이 자유 하는 자 사라의 아들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를 육체로 난 자가 박해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일이 술람미에게도 일어났고 예수님 당시에서 일어났고 바울당시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볼품이 없는 자, 교회당에서도 볼품이 없는 자,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으로 치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신랑이 주신 것으로만 단장을 합니다.

 

오늘 본문 4~6절입니다. “봉독 5절과 6절은 앞에서도 나온 내용이라서 4절을 중심으로 봅니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디르사는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 유다의 왕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은 요새화 되어 있는 곳이라 안전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도 좋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읍처럼 아름답다고 하면서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견고하고 안전한 성읍과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신부의 아름다움을 유순한 초식동물이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로 비유하였는데 여기서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군대로 비유합니다.

 

창세기 22:17절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한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맞이하는 아내 리브가를 보내는 리브가의 친성 사람들도 이런 축복을 합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24:60).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은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입니다. 이러한 전리품은 자신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승리하신 분이 자기희생으로 구하여 내셨습니다.

 

에베소서 4:4~10절입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1)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도 하나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 성령, 소망, ,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하나입니다. 이 교회를 만드시는 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성자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사로잡아 내셔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임을 설교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여호와의 전쟁으로 죄와 사망아래 갇혀 있다가 의와 생명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데 주님께서 아름답다고 봐 주시는 겁니다. 이 아름다움은 율법적인 자기 의가 결코 아닙니다. 의의 선물을 값없이 받았기에 받은 그 아름다움은 영원히 당당합니다. 이런 의를 루터는 수동적 의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10:3).


에베소서 3:9~13절입니다. “9 1)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이것이 교회의 비밀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의 경륜을 교회에 알려주셨습니다. 환난 당하는 바울이 당당하게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 당당함이 있는 여자가 교회입니다.  

 

요한일서 4:17~18절입니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일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화목제물 삼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담대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담대하고 심판 날에도 담대합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도 담대하게 기쁨으로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자는 온전히 그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은 신부들입니다. 이 당당함은 결코 자기의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분의 보혈의 능력만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보혈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가 당당한 신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