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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3:1~13 말씀을 멸시하는 자 2017. 6. 21

 

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지난번에 본 말씀의 제목은 참말과 거짓말이었습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차원의 참말과 거짓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무엇이 참말이며 거짓말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참말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받은 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자기 마음에 나오는 것과 거짓 영에 의하여 주어진 말이기에 자기 자신도 거짓말하는 줄을 알지 못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만약에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고 한다면 그것은 사기꾼입니다. 그런데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기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길에 가다가 어떤 현수막에 갓 신 내림받은 자라는 광고를 봤습니다. 갓 신 내림을 받았기에 신통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로 붙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신 내림을 받은 지 오래되면 신통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점을 보는 비용이 만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무 싸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점을 보게 되면 액운이 있다고 하면서 다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비싼 부적을 싸게 한다든지 큰 굿을 하게 한다면 이런 것들이 다 속임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임이 종교라는 집단에서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속임에 넘어가면 재산상의 손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영혼의 피폐함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짓의 근원을 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8:43~47절입니다.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1)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1)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1)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지난번에 본 말씀입니다.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비틀고 왜곡하여 유혹하기를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 인간은 피조물인 주제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 인줄 착각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만사를 자기중심으로 보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다툼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보다 거짓말이 더 무서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일을 거짓의 아비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마귀가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속지 않으려면 성경이 무엇을 증거 하는지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2~17절입니다.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을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지를 보면 오늘 이 땅에 통용되는 믿음과 다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한결같은 성경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였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우리도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란다면 속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정말로 속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이 지혜가 없으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이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거만한 자입니까? 우리는 다들 거만한 자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훈계나 꾸지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훈계나 꾸지람을 너무도 싫어합니다. 제가 분명하게 잘못하여 꾸지람을 들어도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거만한 자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을 다 거스르는 말씀들입니다. 말씀을 앞뒤 자르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부분적으로 인용하지 않는 한 우리 마음에 드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와 꾸지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지혜로운 아들이며 생명을 얻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멸시하는 자입니다.

 

2절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린다고 하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하는 설교를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사람의 말대로 그 사람이 된다고 하면서 자기 최면을 걸듯이 나는 성공한다. 나는 복을 받는 사람이라는 말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녀에게도 말하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복을 주시라고 기도해 놓고서는 자식이 애를 먹이면 입에서 욕이 나옵니다. 망할 자식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복을 내려주시려다가 다시 회수하여 가신다고 하는 설교도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사람에게서 쌓여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속에 악한 것이 쌓여있으면 악한 것이 나오는 것이며 그 사람의 속에 선한 것이 쌓여있으면 선한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과 선의 기준도 단지 윤리 도덕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언어가 고운 말 바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 속에 악한 것이 가득한데 어떻게 선할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반대하는 자들이 악한 것이 가득하여 악한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2절과 3절이 다 입에 대한 말씀입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온다고 합니다. 알롱소 쇠켈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입은 나무나 땅의 열매를 먹는다. 그러나 입은 또한 자신이 먹을 열매들을 낳는 나무이기도 하다. 말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열매를 맺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떤 말을 하든지 말은 정확히 그 결과를 가지고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그런데 우리의 말대로 만약 다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을 많이 죽였으며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을 죽였겠습니까? 세상은 얼마나 자주 멸망하였을까요? 참으로 우리의 말대로 되지 않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되는 자들이 구원 얻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55:6~11절입니다.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 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의 악한 길을 버리고 우리의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죄인이 용서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고 하시면 어떠한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에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비가 오면 그냥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여도 싹이 나게 하고 소출이 나듯이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교만한 말들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가면 용서를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게으른 자와 부지런 한 자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원한다는 말을 히브리어로네페쉬입니다. 네페쉬는 영혼, 생명, 욕구 등을 말합니다만 사람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로 인간을 표현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네페쉬는 갈망하는 인간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바사르는 몰락하는 연약한 인간을 표현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갈망 합니까? 타락한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잘려졌기에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생명에 대한 갈망을 썩어질 갈망으로 대신 채웁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갈망은 게으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생명에 대한 갈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하여 갈망을 하는 자는 결국 그 마음의 풍족함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 것입니다.

 

5~6절입니다. “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6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합니다. 일상적인 거짓말도 미워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에서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어떤 거짓말을 미워합니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말하게 되면 미워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인이 공의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 행위가 흉악하여 결국 부끄러운 데 이르며 패망하게 됩니다. 의인과 대비하여 보면 악인은 거짓말을 좋아하는 자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지어낸 말을 좋아하는 자는 성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22:15).

 

7절입니다. 스스로 부1)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1)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각주 1)을 보면 스스로 부한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하게 하여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부하게 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하게 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을 지니고도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유하다이러한 번역은 문자대로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아무리 부유한 자라고 하여도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여도 생명이 있는 자는 모든 것에 부요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6:1~10절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1)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2)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바울의 서신이 잠언 13:7절의 해석이라고 봅니다.

 

8절입니다.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제가 아는 어떤 사람의 딸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부모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결국 낳게 하였습니다. 그때 주변의 사람들이 돈 없었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곁에서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수시로 병원에 입원시키고 좋다는 양약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온갖 좋다는 것을 다 해 먹였습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가난했다면 그 딸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재물이 사람의 생명의 속전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비교구절을 보면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자가 되면 여러 가지 편리한 것도 있겠지만 협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 협박을 하지 않아도 그 부함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런 자는 염려와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을 높이고 쇠창살을 붙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생총량 일정의 법칙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성도는 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이신 그 분의 은혜를 입은 자는 극한 가난과 환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힘에 지나칠 정도로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고후8:2).

 

시편 49:6~8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어떠한 재물로도 결코 생명을 속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9절입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오늘 본 잠언에서만 의인의 모습을 찾아보면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사람입니다. 입술의 열매가 있습니다. 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거짓말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공의를 일삼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요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빛이 환하게 된다는 것은 생명으로 풍성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나 등불은 생명으로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악인은 그 등불이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 다는 말씀입니다.

 

10절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교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만을 최고로 여기는 자들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는 다툼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권면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권면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도 지식으로 쌓이게 되면 다툼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리게 되면 자신이 회개하기도 바쁘기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고전8:1). 말씀으로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11~12절입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다른 번역에서는 급하게 모은 재물을 줄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급하게 모은 것이란 부당하게 모은 것을 말합니다. 불로소득과 같은 것이 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입니다. 우리들도 쉽게 얻은 돈은 쉽게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땀 흘려 모든 것은 낭비할 수가 없기에 늘어갑니다. 이것을 단지 세상의 원리로만 읽어도 삶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12절과 연결하여 보면 소망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더디게 보이면 마음이 상하지만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생명나무입니다. 우리의 소원, 우리의 갈망이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생명나무입니까?

 

야고보서 5:1~12절입니다.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본문 7절의 부한 체 하여도 가난한 자가 있고 가난한 체 하여도 부요한 자가 있다는 말씀을 고린도후서 6장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본문 11~12절도 야고보서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보는 것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봅니다. 망령되이 재물을 모으려고 급하게 서두르는 자가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줄어갈 것이고 자기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간다는 말은 세상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망령되이 모은 자들이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소망에 관한 이야기로 연결하여야 합니다. 썩어질 소망이 아닌 썩지 아니할 소망은 더디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그 결국에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재물을 쌓거나 의지하지 말고 농부처럼 인내하라고 합니다. 욥의 인내도 생각하라고 합니다. 욥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받았지만 그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13절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룹니다. 그러나 말씀 곧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찾아본 말씀만 해도 상당한 양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돌아보면서 말씀 앞에 두려워하는 자가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멸시하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일에 마음이 급하고 그것들만을 갈망한다면 결국 영원히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네페쉬가 생명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썩어질 것들이라면 결국은 몰락하는바사르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최초로 말씀을 멸시한 현장이 에덴동산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사탄의 유혹을 받아 말씀을 멸시한 결과는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생들은 흙을 파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타락한 인간을 찾아오시고 가죽 옷을 입히시며 친히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어진 말씀으로 그 약속의 완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았다는 자들이 약속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문자에 갇혀서 성전을 지어드린다고 하고 소를 잡아 바치고 양을 잡아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를 돌보십니다.

 

이사야 66:1~5절을 보면 성전을 짓고 소와 양을 바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는 자들을 돌보신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롯의 사위들이 멸망합니다. 그 성에서 나오던 롯의 처도 천사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함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멸시하는 자리는 십자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멸시하는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말씀을 멸시한 자 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들이 생명을 얻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테텔레스타이!